"70, 80년대에 세계 주산(珠算)계를 주름잡던 한국인데, 주산인으로서 관련 기념관 하나 없는 게 서운했죠."
한국 주산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주산 역사박물관'이 국내 처음으로 전북 군산에 생긴다. 평생을 주산교육에 몸바쳤고 그 결과 수십년째 깨지지 않는 기록까지 기네스북에 올려 놓고 있는 한국 주산인들이지만 주산이 계산기와 컴퓨터에 밀리고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가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이 사업을 주도한 인물은 주산 9단, 암산 9단의 박광기(53) 한국나노주산암산협회장. 그는 12일 "군산 장리동 한국근대사박물관 인근에 300㎡ 규모의 공간을 최근 확보했다"며 "박물관 설립자금 모금과 전시 자료 수집 작업을 벌이고 있는'한국 현대주산박문관 설립 추진위원회'의 업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이 공간을 각종 자료로 채울 것"이라고 말했다. "주산에 미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씨는 이번 박물관 건립에 사비로 2억5,000만원을 내놓았다. 한국나노주산암산협회는 정통 주산 지도자 1,700여명으로 이뤄진 단체다.
내년 3월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박물관에는 군산 출신의 김일곤(78) 선생이 평생 모든 주산 관련 자료 유물 5,00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한국 주산의 산증인이자 현대 주산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사실 이번 박물관 설립은 박씨와 김씨의 특별한 인연이 없었더라면 애당초 불가능했을 사업. 박씨는 "주산 검정규정은 '10분 내에 20문제'로 돼 있던 것을 암산으로 24초 만에 풀었다던 중등주산 국가대표의 이야기가 20~30년 전에 크게 회자됐다"며 "그 사람이 김일곤 선생의 제자라는 이야기는 익히 알았지만 10여년 전 우연한 기회에 그 김일곤 선생을 만나면서 맺은 인연을 아직도 이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주산과 암산 실력은 물론 그 지도기법에 '충격'을 받은 박씨가 전북 군산에서 김 선생이 있는 경기 구리까지 찾아가 배우기 시작했고, 김씨는 10년이 넘어서도 한 달에 한번 꼴로 그를 찾고 있는 박씨를 신뢰하게 되면서 평생 모은 자료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박씨는 "김 선생님은 항상 '미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는 불광불급을 강조했다"며 "먼 거리를 한 달이 멀다 하고 오가는 모습에서 '주산에 미친 것'으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가 주산 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자료에는 국내외 주산 자료가 망라됐다. 우리나라는 물론 대만,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에서 열린 각종 국제대회의 포스터와 문제지와 경기 성적, 각종 기념패와 트로피, 사진 등 여느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들이다. 박씨는 "70, 80년대 한국 주산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당시 주산의 주무대이던 상업고교 어느 곳에서도 당시 자료를 갖고 있는 데가 없다"며 "박물관이 건립되면 국내 주산이 옛 명성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 건립에는 기라성 같은 주산인들이 참여한다. 주산 11단의 이찬희, 이정희씨와 이춘덕 서울여상 교사가 박물관 설립 추진위원으로 참여한다. 특히 이춘덕씨의 경우 1983년 계산기능세계대회에서 10만 단위 숫자 2개의 곱셈 답을 5초 만에 적어내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 그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주산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기억력과 집중력을 계발하는 데에 이만한 게 없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면 잘 안 믿잖아요. 주산 박물관이 그 불신을 씻어낼 겁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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