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초, 주한 미군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지 장군은 인천항을 통해 상륙하기 전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일본인 교수들을 배 위로 불렀다. 하지가 그들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물은 마실 만한가?"였다. 생명과 건강에는 무엇보다도 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들어온 미군이 가장 먼저 조사한 것도 수질이었다. 조사를 담당한 미군 장교는 전반적으로 엉망이라고 보고했다. 일제가 군수용품으로 쓰기 위해 동제 수도관을 철거하고 함석관이나 콘크리트 관으로 교체했기 때문에 수돗물에는 녹물과 불순물이 섞여 있었다. 수돗물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서울 전역의 우물 2만여 개소 중 음용으로 적합하다고 판정받은 것은 거의 없었다.
군정 당국은 미군용 식수를 수송하기로 결정했으며, 부득이한 경우 끓이거나 추가로 염소 소독을 하도록 했다. 한국인들에게는 반드시 물을 '끓여' 마시라고 홍보했다. 그러나 들어가 누울 방 한 칸 없이 떠도는 사람만 수십 만 명이었고, 사정이 좀 나은 사람들도 더운 여름에 비싼 땔감 써 가며 물을 끓여 먹을 형편까지는 못 되었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잘 몰라서, 또는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그냥 마셨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예방 접종만으로는 콜레라와 장티푸스, 이질 같은 전염병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이 강물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1908년부터였다. 개항 이후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 의사들은 매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전염병의 주 원인으로 오염된 우물을 지목했다. 화강암이 많은 지질 덕에 한반도의 물은 석회암 지대의 물에 비할 수 없이 맑고 깨끗했다. 대한민국의 국제 명칭인 코리아는 산 높고 물 맑은 산고수려(山高水麗)의 나라라는 뜻인 고려가 변한 말이다. 자연의 정수 과정을 거치는 우물들도 처음에는 맑고 깨끗했으나, 역시 세월의 더께를 피할 수는 없었다. 18세기 이후 서울에 물장수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오염된 우물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강물을 인위적으로 정수하면 더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고종은 서울에 상수도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1898년 자신이 전액 출자하여 설립한 한성전기회사에 사업 독점권을 주었다. 그러나 공사는 바로 개시되지 못하고 사업권만 한미전기회사를 거쳐 영국계 대한수도회사에 넘어갔다. 대한수도회사가 뚝섬에 정수장을 건설하고 수돗물 공급을 개시한 것이 1908년이었다.
수돗물은 등장하자마자 '특권적 식수'가 되었다. 상수도는 특권적 공간인 도시의 핵심 시설이었지만 도시민들이라고 모두 수돗물을 마실 수는 없었다. 도시민들도 수돗물을 기준으로 다시 나뉘었다. 집 안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수돗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 집 밖 공용 수도꼭지에서 수돗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 우물물을 길어 마시는 사람 등. 일제 강점기 문패 옆에 붙은 '수도사용가(水道使用家)' 표지는, 전화번호와 더불어 부잣집 인증 마크 구실을 했다. '특권적 식수'였던 수돗물이 보편적 식수로 바뀐 것은 겨우 한 세대 전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섭취하는 물의 대부분은 강물이다. 인체의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한국인 몸의 70%도 강물인 셈이다. 그 강물이,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강은 여러 용도로 쓸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용도는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강은 생명이요, 인체 그 자체다.
정부는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수질을 개선'하며 '사후 대책에서 벗어나 사전 예방 종합대책을 수립'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막상 녹조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대통령은 '기후' 탓만 하고, 관계 공무원들은 '물 끓여먹으라'는 소리나 한다. 도대체 국민 세금 수십 조원을 쏟아 부어 무엇에 대비하고 어떤 사전 예방 종합대책을 세웠다는 말인지. 앞으로도 여름철 녹조 현상이 계속되면 똑같은 대답을 반복해 들어야 할 모양이다. 게다가 4대강 사업 비리로 구속된 사람만 이미 여럿이다. 4대강 사업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강변하던 분들, 비리로 사복을 채운 분들에게 묻는다. "물은 마실 만한가?" 그리고 "떡고물은 먹을 만 했는가?"
전우용ㆍ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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