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의 보수적인 당 원로와 학자 336명이 개혁적 정치성향을 보여 온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파면을 요구하고 나섰다. 최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전 총리 등 보수파의 행보가 두드러진 가운데 나온 요구여서 주목된다. 가을 지도부 교체를 앞두고 보수파와 개혁파가 본격적인 사상 투쟁에 돌입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8일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뉴스사이트 둬웨이(多維)에 따르면 친중다(秦仲達) 제13차 공산당 중앙위원 등 보수파의 대표적인 당 원로와 학자들이 5월 30일 원 총리의 파면을 요구하는 서한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및 당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서한에는 친 중앙위원 외에 장친더(張勤德)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국장, 류중허우(劉仲侯) 장쑤(江蘇)성 정법위원회 서기, 시자오융 난징(南京)대 경제학 교수, 리청루이(李成瑞) 전 국가통계국장, 마빈(馬賓) 전 국무원 경제기술사회발전연구센터 고문 등이 서명했다.
이들은 서한에서 “원 총리의 지시로 4월 6∼10일 베이징(北京)시의 공안국과 신문판공실, 국무원의 신문판공실 등에 개설돼 있던 마오쩌둥(毛澤東) 깃발(旗幟), 유토피아, 홍색중국, 둥팡훙(東方紅), 마르크스주의평론 등의 사이트가 폐쇄됐다”며 “이는 중국 인민의 언론자유를 침해한 행위이자 정치적 사건으로 명백한 범법행위”라고 비난했다. 서한은 이어 “원 총리가 내부 목소리에는 귀를 닫은 채 국유기업을 축소, 해체하고 자본주의식 사유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중국 내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화하고 사회주의 경제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며 개혁파를 공격했다. 서한은 나아가 “원 총리가 공산주의 일당체제가 아닌 자본주의식 다당제에 바탕을 둔 정치 개혁을 도모,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이징 정가는 권력 교체가 이뤄질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차기 지도부 구성을 논의할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가 열리고 있는 와중에 원 총리 파면 촉구 서한이 공개된 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앞서 6일자 13면을 거의 다 할애해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에 힘쓴 인물’이라며 리펑 전 총리를 칭송하는 글을 게재했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도 지난 주 세 차례나 언론에 자신의 동정을 노출시키면서 건재를 과시했다. 두 사람 모두 1989년 6월 4일 톈안먼(天安門) 사건 당시 강경 진압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보수파의 대표 인물이다.
반면 원 총리는 톈안먼 사건 당시 강경 진압에 반대해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의 비서실장이었다는 점에서 개혁파로 분류된다. 실제로 원 총리는 줄곧 정치개혁을 주장, 보수파와 갈등을 빚었으며 당내에서 톈안먼 사건의 재평가를 요구해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서기를 비롯한 보수파와 정면 충돌한 것으로 전해진다.
베이징의 소식통은 “당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를 선점해야 한다”며 “보수파와 개혁파뿐 아니라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백가쟁명식의 사상투쟁이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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