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면 누구 하나 대단치 않은 이가 있을까마는, 개인적으로 런던올림픽에서 가장 놀라운 건 우리 펜싱선수들이다. 2000년 시드니에서 김영호가 첫 금메달을 따고 지난번 베이징에서 남현희가 주목을 받았어도 그저 박태환, 김연아처럼 불쑥 튀어나온 돌연변이로만 여겼다. 이번엔 남녀 개인ㆍ단체에 두루 걸쳐 금메달 2개를 포함, 모두 6개의 메달을 따냈다. 이 정도면 이론의 여지없는 펜싱 강국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펜싱은 다른 세계의 경기였다. 유럽선진국들만의 우아한 놀이처럼 보였다. 도대체 우리 주변에서 펜싱 하는 이를 제대로 본 적이나 있던가. 그런데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어딘가에서 누군가 꿈을 키워가며 맹렬히 세계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올림픽은 그렇다 치고 생각난 김에 지난 광저우아시안게임 전적을 찾아보곤 새삼 또 놀랐다. 요트, 우슈, 세팍타크로 등 별별 종목에서 우리 선수들이 거둔 대단한 성적들이 줄줄이 나열돼 있었다. 그러고 보면 비슷하게 경이로운 느낌이 전에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비보이대회를 평정한 젊은이들이 예전 밤늦은 지하철역사 빈 구석에 모여 놀던 바로 그들이었음을 알게 됐을 때도 그랬다.
그뿐인가. 잘 훈련 받아 노래와 동작이나 맞추는 것처럼 보였던 어린 가수들이 어느 틈엔가 한류의 중심 아이콘으로 부상해 세계인들을 열광케 하고 있다. 얼마 전 TV에서 알래스카 개썰매대회를 목표로 여름 날 산속에서 판자에 바퀴를 달아 맹훈련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나라 곳곳에서 정말 다양한 이들이 생각지도 못한 온갖 분야에서 각기 열정을 다해 놀라운 성취들을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나 쇼 비즈니스 세계만이 아니다. 둘러보면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 일일이 주요 방향과 우선 과제들을 제시하고 대중을 이끌어가는 시기를 벗어나, 모든 분야에서 저마다 스스로의 다양한 동기와 자체 추동력으로 사회가 굴러가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경제지표상의 수치보다는 이게 마침내 우리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표다.
올림픽 소식이 연일 즐겁지만 현실은 역시 대선 정국이다. 때가 때이니만큼 정정당당한 승부, 규칙과 결과에 대한 승복 등 정치에서도 스포츠정신의 구현을 요구하는 뻔한 주문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정작 깨닫는 것은 시대변화에 상응하는 지도자의 역할변화다.
워낙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터라 우리는 이승만, 박정희, YS, DJ 같은 거대 정치지도자들에게 익숙해있다. 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를지라도 어쨌든 이들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나름의 시대적 방향을 제시하고 앞장 서 국가를 이끌었다. 국민의 기대도 그랬거니와, 지도자들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상황에선 마땅히 개척자나 향도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지났다. 사회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 성장할 힘을 갖게 됐고, 무엇보다 국민 전반의 수준도 크게 높아져 여간 해선 나보다 나은 엘리트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됐다. 이런 흐름에서 전 같은 '내가 옳으니 따르라'식의 일방형 리더십은 더 이상 적용되기 어렵다. 도리어 독선과 불통, 그로 인한 갈등의 증폭으로나 이어지기 십상이다. 역사를 뒤집고, 국토를 개조하겠다고 과욕을 부린 전ㆍ현 정권의 실패도 이런 시대정신의 오독(誤讀)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국민들부터 옛 거대 지도자들의 기억을 털고 시대상황에 맞게 대통령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 장대한 비전보다는 소소해도 그냥 합리적인 상황관리능력을 갖춘 정도의 인물이면 족하다. 소신보다 소통, 개혁보다 개선, 방향제시보다는 조정능력이 지금의 지도자에게 더 어울리는 덕목이다. 아마 그런 인물이 나라를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바꿀 것이다. 올림픽을 보며 새삼 얻는 깨달음이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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