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야생화 피어나는 소리로 산이 소란스러운 달이다. 얼핏 보면 꼭대기부터 얕은 비탈까지 초록 일색이다. 그러나 허리를 굽혀 보면 산의 빛깔이 다른 계절보다 훨씬 풍성함을 알 수 있다. 무릎 아래, 혹은 허리 높이에서 펼쳐지는 자그맣고 예민한 색의 잔치. 식물도감을 펴 봐도 여름 꽃이 실린 부분의 두께가 봄 꽃 부분의 두 배쯤 된다. 특히 고산식물의 개화기가 여름에 집중돼 있다. 이 꽃들은 대부분 크기가 작다. 작은데도 벌과 나비를 유혹하느라 생김새가 무척 요염하다. 손톱만한 꽃잎과 눈썹만한 꽃술이 자아내는 꽃멀미, 이 염천에 결국 산행에 나서게 할 만큼 아찔하다. 동북아식물연구소 현진오 소장과 함께 야생화가 고운 여름 산행지를 꼽아봤다.
금대봉
금대봉(1,418m)은 강원 태백시와 정선군의 경계에 솟아 있다.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를 품은 깊은 산이다. 금대봉과 북쪽의 대덕산(1,307m) 능선을 경계로 사이의 계곡 일대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가시오갈피나무, 개병풍 등 법정 보호종과 개불알꽃, 골고사리, 대성쓴풀, 털댕강나무, 홀아비바람꽃, 구슬댕댕이, 세잎승마 등등 희귀 식물이 자생한다. 8월 중순 이후엔 가을꽃의 개화도 시작된다. 요즘엔 큰제비고깔이나 투구꽃의 빛깔이 곱다.
야생화 트레킹의 출발점인 두문동재(싸리재ㆍ1,268m)까지 자동차길이 나 있다. 그래서 높이에 비해 산행이 그다지 힘들지 않다. 야생화 붐이 일면서 찾는 이가 부쩍 많아졌다. 금대봉 정상과 분주령 거쳐 검룡소까지 하산하는 코스가 인기가 높다. 태백시는 내년부터 하루 탐방 인원을 300명으로 제한하는 사전예약제를 운영할 계획이다. 태백시 환경보호과 (033)550-2061
점봉산
'천상의 화원'이라는 별명이 붙은 곰배령(1,164m)으로 더 친숙한 산이다. 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출입이 매우 까다롭다. 진동리부터 곰배령까지의 구간에 하루 200명만 출입이 허용된다. 한 달 전 시작하는 인터넷 예약은 몇 분 만에 마감될 때가 많다.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이 맞닿는 곳으로, 한반도에 사는 식물의 20%에 해당하는 850여종이 살고 있다.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최대 군락지이기도 하다.
동자꽃, 물봉선 등 흔한 꽃부터 금강초롱 등 희귀종까지 다양한 여름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참나물, 곰취, 고추나물 등 산나물들도 하얗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점봉산생태관리센터부터 강선마을 거쳐 작은점봉산(1,297m) 아래쪽 곰배령까지 다녀오는 트레킹 코스는 왕복 10㎞ 정도 된다. 옛날 할머니들이 콩자루 이고 장 보러 넘어다니던 길로 전해질 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3-8166
설악산
설악산은 남한 땅에서 북방계 식물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비늘석송, 두메오리나무, 숲개별꽃, 바람꽃, 장백제비꽃, 금강봄맞이, 만주송이풀 등이 그것이다. 삶은 달걀을 쪼개 놓은 듯한 바람꽃, 회백색 솜털이 소복한 다북떡쑥 등은 설악산 고지대 능선에서만 발견되는 여름 꽃이다. 높은 바위 봉우리와 암반이 노출된 능선이 많아 이런 고산 야생화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설악산은 모데미풀, 변산바람꽃 등 남방계 식물이 분포하는 한반도의 북쪽 끝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악산 여름 야생화 트레킹의 묘미는 역시 한계령(1,004m)부터 정상인 대청봉(1,708m)에 이르는 고지대에서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초원보다 바위 틈에 특별한 여름 꽃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공룡능선에서 보다 많은 희귀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 설악산 국립공원사무소 (033)636-7700
석룡산
경기 가평군과 강원 화천군에 걸쳐 있는 석룡산(1,147m)은 금강초롱을 만날 수 있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로 꼽힌다. 기린초, 까치수염, 산수국, 가는장구채, 동자꽃, 둥근이질풀, 덩굴별꽃, 마타리, 바위채송화, 칼잎용담 등 온갖 야생화가 봄부터 가을까지 꽃잔치를 이어간다. 지금은 산오이풀, 한라구절초, 눈괴불주머니, 초롱꽃 등이 색색의 꽃을 틔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정지역인 가평천의 상류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풀빛과 물빛, 하늘빛이 모두 곱다.
6㎞에 이르는 조무락골 계곡이 있어 야생화 트레킹과 물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휴전선 부근인 대성산, 백암산이 보일 정도로 산세가 웅장한데도 등산로가 완만하다. 깨끗한 폭포와 소(沼)가 이어져 있어 여름 산행에 적당하다. 가평군 산림공원과 (031)580-2481
한라산
한라산(1,950m)에는 약 1,800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전체 식물 종의 절반에 이르는 숫자다. 낮은 곳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가 하면, 정상부 초원지대에서는 고산 식물이 자라고 있다. 한라고들빼기, 제주방울란 등 '제주'와 '한라'라는 말이 이름에 들어간 특산 식물만 70여종에 이른다. 지금 한라산을 찾는다면 네귀쓴풀, 손바닥난초 등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여름 꽃을 만날 수 있다.
야생화 트레킹은 영실에서 윗세오름산장 거쳐 어리목에 이르는 코스가 인기 높다. 산행 거리는 비교적 짧지만 긴 고산 초원 지대를 지나기 때문에 귀한 야생화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산을 내려와 바닷가로 가면 황근, 문주란 등의 야생화도 만나볼 수 있다. 한라산(어리목) 국립공원 탐방안내소 (064)713-9950
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일부 사진 인제국유림관리소 제공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