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2030 세상보기] '올림픽 비판'에 대한 다른 생각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2030 세상보기] '올림픽 비판'에 대한 다른 생각

입력
2012.08.08 12:08
0 0

국민들의 절대다수가 올림픽 소식에 귀를 기울이면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커진다. 이른바 올림픽에 대한 '진보적 시선'일 텐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첫째, 올림픽은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할 다른 이슈들을 사라지게 만든다. 둘째, 올림픽은 실제로는 체제의 배려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체제 속에 통합되어 있다는 허구적인 의식을 만든다. 셋째, 올림픽은 광고하는 것과는 달리 사실은 적자투성이 이벤트다.

제각기 가능한 비판이긴 하지만 의문점도 없지 않다. 올림픽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을 못 본단 지적은 극단화하면 "바캉스를 간 동안 북한이 쳐들어오니 휴가를 금지하자" 수준의 논의가 아닐까. 빈곤층이 체제에 통합적인 의식을 가지는 게 문제인가, 아니면 체제가 빈곤층을 통합시키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가. 올림픽 유치와 개막식 등에 돈이 많이 든단 지적엔 동의하더라도, 그 비용 전부를 비판한다면 각 종목 운동선수에 대한 '일자리 창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닐까. 올림픽과 운동선수들이 눈요기만 줄 뿐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비판한다면 이 세상 직업의 절반 이상과 대부분의 이벤트의 존재가치가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G20 같은 행사에 비한다면, 사람들은 이 이벤트에 즉자적인 쾌감을 얻고 '세금 낸 보람'을 말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경기를 보는 이들이 하는 '진보적 비판'도 핀트를 어긋난 경우들이 있다. 금메달을 중시하는 메달순위 집계를 하는 조국의 현실에 분개하는 이들이 있지만 아예 순위를 안 매기기로 했다면 모를까 나라마다 제각각인 순위산정 방식에서 한국의 것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은·동메달을 받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현실이 '구리다'고 반응하는 이들이 있지만 과거와 비교해 생각해보면 시상식에서 환하게 웃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우승을 노렸던 이가 준우승이나 3위를 차지했을 때 슬퍼하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하다. 월드컵 축구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면 국가주의에 세뇌된 촌스러운 우리만 눈물 흘리는 걸로 '교육' 받았지만 우리는 지난 월드컵에서 한국에 패한 그리스 선수들이 흘린 눈물을 보았다. 엘리트체육의 문제는 한국 스포츠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문제겠지만 한국인들이 생활체육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시설미비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에도 엘리트체육 육성과정이 없지 않다. 또 오히려 생활체육 열풍도 올림픽에서의 성과 이후에 오는 경우가 있다.

같은 국가대항전 스포츠 제전이라도 올림픽에 대한 열망은 월드컵에 대한 그것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축구가 전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유비라면 올림픽은 이 세상이 구성되는 일상에 대한 강력한 유비라는 점에서 다른 의미의 보수성을 구성한다. 역설적으로 메달경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에도 스타로 떠받들던 박태환이나 김연아 뿐만이 아니라 비인기종목의 선수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경기를 즐긴다. 집단의 성과를 위해 그 성과의 한 부분에 기여한 개인의 서사에 주목하게 되는 역설이 생긴다.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스타 몇 명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던 사이에도 땀을 흘리던 그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통찰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그 통찰의 외곽에서 올림픽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이 사회가 그 소중한 통찰을 지켜주는 사회인지를 묻는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착취관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중노동시장과 같은 우리 사회의 구조는 올림픽의 메달경쟁이 주는 역설적인 '평등'과는 다른 방향에 서 있다. 재벌그룹들이 투자를 한 성과가 돌아오는 이 올림픽 메달 레이스에서, 우리는 그들이 '눈요기'에 돈을 썼다 비판하기 보다는 돈을 쓰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다른 영역에 대한 질문을 준비해야 할 게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 안에서 주장을 펼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취향의 사람들에 대한 존중 문제는 따로 가져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