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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산사에서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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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산사에서 하룻밤

입력
2012.08.0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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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맺혔던 굵은 땀방울이 대웅전 마루에 뚝 떨어졌다. 108배를 겨우 절반쯤 했을 뿐인데 온몸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젖었다. 산사체험 유니폼을 입은 20여명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에는 푸른 눈의 금발청년이 있다. 본존불 앞에서 덜덜거리는 선풍기 몇 대로는 숨막히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해가 황악산 산마루를 지나며 긴 그림자를 남겼지만 그 기세는 아직 등등했다.

경북 김천 직지사.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사찰인 이곳은 도심의 훤소를 피해 '참나(眞我)'를 찾으려는 사부대중들의 참선수도가 한창이다. 많은 사찰 중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이유는 세 가지다. 8년 전쯤 취재차 들렀을 때 인상 깊었던 조경, 동시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 시설, 절 아래 음식점의 산채정식이었다.

108배를 끝내고 숙소로 들어가다 보니 그 금발청년이 옆방에 묵고 있다. 벤자민 풀셔(26)라는 이 청년은 호주 출신으로 지난 4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은 후 세계 일주를 하는 중이란다. "론리 플래닛을 통해 산사체험 프로그램을 알고 지원했다"는 그는 "런던에서 출발해 러시아 몽골 중국을 통해 한국에 온 후 지산밸리에서 열린 라디오헤드 공연을 봤으며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후 깊은 밤 산책을 나섰다. 산사의 밤은 신비롭다. 무덥고 번잡한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도 밤에는 성큼 다가왔다. 시원한 산바람에 실려오는 숲향, 우렁찬 계곡물 소리, 키 큰 노송 위에 걸터앉은 보름달, 달빛이 부서지는 팔작지붕 절집의 날렵한 곡선, 잊을 만하면 들리는 두견새 소리 등…. 방에 들어와 불을 끄자 곧바로 달빛이 방 깊숙이 스며든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번뇌 망상으로부터 해탈한다는 데 대웅전 바로 아래 요사채에서 석탑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호사가 있을까. 잠을 청하지만 머리가 맑아진다.

눈을 감고 낮에 만난 나무를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급하게 둘러볼 땐 보이지 않던 게 잘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절에서는 머무는 만큼 잘 볼 수 있다. 나무도 수도승을 닮아가는지 다들 예사롭지 않다. 성보박물관(청풍료) 옆에 있는 호두나무와 감나무는 그 높이가 건물 6층 높이에 이른다. 부채살 모양으로 탐스럽게 퍼진 반송도 적어도 백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 그 아래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곳에서 놀랍게도 깨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박물관 지킴이 말로는 심은 것도 아닌데 매년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8년 가까이 직지사를 가꿔 온 주지 성웅스님(74)께도 인사를 올렸다. 하루에 잠을 3시간 이상 자지 않고, 의자에 앉아도 등을 절대 붙이지 않을 정도로 꼬장꼬장한 노스님에게 법어라도 들어 볼 요량이었다. 스님의 말씀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백 척 높이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뜻이다.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후 더욱 노력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절망의 끝에서 슬픔과 분노를 내려놓고 정진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지난 봄 깊은 충격과 상처를 안겨준 도박파문 이후 혼란을 겪고 있는 종단에도 들려주고 싶은 얘기다. 이런 저런 생각을 뒤섞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른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가 잠을 깨웠다.

경내가 뜨겁게 달궈지는 아침나절. 옆에 놓인 정찬주의 <선방가는 길> 을 펼쳤다. 통일신라시대때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거사의 열반송이 들어온다.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분별이 사라지고 귀로 듣는 소리 시비가 끊어지네. 분별과 시비를 훌훌 놓아버리고 오직 마음부처 찾아 스스로 돌아가네.>

산사를 내려오는 길. 벤자민을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며 물었다. "입증된 것만을 좇는 과학자가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가?""과학만으로 인간의 행복을 설명할 수 없다"고 간명히 답하는 금발의 행자. 힘겨운 학업을 마치고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도는 그에게서 끊임없이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부처의 모습이 연상된다. 산사에서 하루는 짧았지만 그 여운은 길다.

최진환 문화부장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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