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애니메이션 대작 흥행이 연례행사다. 하지만 아무리 애니메이션이 화려하다 한들 단행본 만화를 보는 그 소박한 재미를 대신할 수 있으랴. <아이큐점프> 다음 호가 배달될 즈음 마음 졸이며 초인종 소리만 기다리고, 용돈을 모아 원수연의 <풀하우스> 를 한 권씩 사 모았을 때의 그 뿌듯함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기란 힘든 일이다. 풀하우스> 아이큐점프>
책 읽지 않는 시대의 조류를 만화라고 비껴갈 리 만무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02년 상반기 출간 단행본 만화는 3,974종이었는데 올해 상반기는 1,773종으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화 보지 않는 사람이 그만큼 줄었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다. 단행본 만화의 빈 자리를 인터넷 웹툰이 메꾸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리서치회사 코리안클릭 집계에 따르면 6월 '네이버 만화'는 약 692만명, '다음 만화속세상'은 약 308만명의 순방문자(한 번 이상 방문한 사람)를 기록했다.
만화라는 장르의 저력에 새삼 감탄하며, 인기 만화가 5명에게서 읽을 만한 만화 5권씩 추천(이유까지) 받아 기분에 맞춰 볼 수 있게 분류했다. 선정 기준은 교양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도,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감성이 넘치는 것도, 인류의 지적 성취를 보여주는 것도 물론 아니다. 메시지가 있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찜통 더위를 잊어버릴 만큼 재미있어야 할 것, 딱 두 가지다.
세상의 불의에 분노를 품고 산다면
▦살인자ㅇ난감(꼬마비, 노마비)
우발적인 살인 후에 따라오는 두려움과 죄책감. 그렇지만 내가 죽인 그 사람이 알고 보니 죽어 마땅한 이 '사회의 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범죄에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살인과 우연이 반복되면서, 살인자는 어느새 자신의 충동적 살인이 '정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문제작.
▦쌉니다 천리마마트(김규삼)
수도권 신도시의 대형마트를 배경으로 신자유주의를 풍자하는 날카로운 블랙코미디. 대기업 대마그룹의 공식 유배지로 불리는 천리마마트에 백수 청년 문석구가 취업하지만 모든 직원이 동시에 그만두면서 일이 꼬인다. 배꼽 잡는 웃음 속에 작가의 주제의식이 강하게 담겨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공감도가 클 것이다.
▦사람냄새(김수박)
인디 만화의 기세가 대단했던 90년대 이후 상당수의 작가들이 웹툰으로 빠져나간 이후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수박 작가가 삼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19세에 삼성반도체공장에 입사해 2년 만에 백혈병을 얻은 딸이 산업재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홀로 싸우는 택시기사 황상기씨의 이야기를 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황상기는 몇 년 만에 본방을 사수했던 드라마 '추적자'의 백홍석과 완벽하게 오버랩 된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단한지' 이유를 알고 싶은 서민들에게 각성제 역할을 할 것 같다.
슈퍼 히어로의 존재 이유가 궁금하다면
▦배트맨-다크나이트리턴즈(프랭크 밀러)
미국만화는 프랭크 밀러, 앨런 무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배트맨-다크나이트리턴즈'는 앨런 무어의 '왓치맨'과 함께 미국만화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키고 코믹북에서 그래픽노블로 진화시킨 만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 시리즈 역시 이 만화에 빚지고 있다. 고담시의 악당들이 모두 사라지고 무기력해진 브루스웨인이 다시 배트맨의 옷을 입고 활약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유치한 설정의 슈퍼영웅담에 불과했던 배트맨 이야기는 프랭크 밀러의 이 작품에 의해 어둡고 무거운 누와르 스타일의 고뇌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되돌려졌다.
▦아이 앰 어 히어로(하나자와 켄고)
찌질이가 좀비에게서 이웃을 구한다. 유명 만화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찌질한 히데오. 일도 안 풀리고 연인도 자신의 곁을 떠날 것만 같아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사람이 사람을 물어뜯는 괴상한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전역이 좀비화 되는 상황에서 영웅의 일본식 음독 히데오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좀비들과 사투를 벌인다.
▦셜록(권교정)
셜록은 항상 옳다. 원작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BBC 드라마와 영화까지 섭렵했으며, 샤이니의 노래 '셜록'도 좋아한다. 그 많은 '셜록' 중에 그러나 권교정의 만화 '셜록'이야말로 으뜸이다. 다른 '셜록'들이 좀 변화구스럽다면 만화 '셜록'은 직구에 가깝다. 원작의 맛이 가장 살아있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작가가 현재 투병 중이어서 만화잡지 '파티' 연재도 잠정 중단됐다.
집 나간 입맛을 되돌리려면
▦심야식당(아베 야로)
일본 신주쿠 하나노조의 한 골목에서 '마스터'라고 불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사나이가 운영하는 조촐한 밥집(겸 술집)을 배경으로 했다. 제목처럼 심야에만 문을 여는 식당이라 등장인물들이 주로 야쿠자, 클럽댄서, 만화가, 야근하는 회사원 등 도시의 이면에서 소박한 새벽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를 맛나게 버무렸다. 말 수 없는 식당아저씨, 참견쟁이 아줌마, 고집불통 할아버지, 날라리 여동생, 말 안 듣는 남동생 등 정감가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한국 관련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해 더 흥미롭다.
▦식객(허영만)
이 히트작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볼수록 대단하다. 우리 정서를 담아 만든 에피소드들이 정말 맛 나게 버무려져 있다. 야구만화, 권투만화 등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만화를 주로 그렸지만 여성독자를 끌어들이는 '순정' 코드를 잊지 않는 센스. 아직 휴가지를 결정하지 못했다면 '식객' 로드를 따라 그 곳의 별미를 맛보는 것도 재미난 여행이 될 것이다.
▦오무라이스잼잼 (조경규)
먹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가 식탁 위에 얹어 놓고 키득거리며 즐겨 찾는 만화. 온갖 미사여구의 향연이 펼쳐진 여느 음식만화와 달리 비빔면은 팔도가 왜 맛있는지, 계란 후라이는 어쩌다 전천후 밥 반찬 공격수가 됐는지, 양념치킨은 왜 한국에서 만든 최고의 서양식 요리인지 같은 이야기를 정보를 담아 풀어냈다. 단, 배고플 때 보면 안 된다. 몸에 별 이로울 것 없는 온갖 인스턴트 음식에 대한 상찬이 가득하기 때문에 넘어가기 쉽다.
▦고독한 미식가(다니구치 지로)
배가 고프니 먹을 뿐. 일 때문에 끼니 놓치는 게 다반사인 주인공은 공복을 못 참는 남자.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맛집을 순전히 감으로 찾아낸다. 뭘 많이 먹지도 않고 해설보다는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데 그 자체로 식욕을 자극한다. 이것저것 빼고 먹는 것 자체를 담백하게 묘사했다. 솔로 음식남녀에게 권한다.
배우자의 귀여움을 망각한 부부들에게
▦마조앤새디(정철연)
'마린블루스 정철연의 미치도록 재미난 생활툰!'이라는 부제처럼 미치도록 재미있다. 가정주부이자 만화가인 마조(곰)와 바깥일을 하는 아내 새디(토끼)가 펼치는 신혼부부의 일상을 가학적인 유머코드로 버무려 고통스러운(?) 웃음을 선사한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해일처럼 밀려 올 때 조용히 화장실에 가서 10분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보길 권한다. 우리 집 화장실 서가에 반년 넘게 꽂혀있는 만화다.
▦어쿠스틱 라이프(난다)
다음 연재 웹툰 중 생활만화로는 단연 으뜸이다. 생활의 소중함과 소소힌 재미를 깨알 같은 표현으로 즐거움을 준다. 연재중인 만화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온다는 '슬럼프'따위는 없다는 듯이 연재는 점점 더 재미있어져 이제는 '재미의 도'를 넘어선 위엄까지 보인다.
다양한 캐릭터와 미스터리한 고전SF의 압축판을 원한다면
▦11인이 있다!(하기오 모토)
우주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외부와 접촉이 끊긴 우주선에서 53일간 살아남아야 하는 11명의 수험생 이야기. SF고전단편만화로 이 작가의 상상력이 끝은 어디인지 궁금증이 일게 한다.
▦THE CRATER (데즈카 오사무)
'트와이라이트 존'이나 '어메이징 스토리' 같은 기묘한 이야기들을 다뤘다. 어디선가 들리는 종소리에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며 과거를 떠올리거나, 제물로 바쳐진 이름없는 한 소녀의 환상 등 삶의 諍恝?부분을 소재로 한 단편선들.
▦사가판 어류도감, 사가판 조류도감 (모로호시 다이지로)
일본 괴담만화의 대가가 만든 물고기와 새를 주제로 한 기묘한 이야기 모음. 동양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환상적이면서도 괴기스럽고 한편 독특한 발상이 빛나는 이 만화를 반드시 좋아할 것이다.
삶의 찌든 때가 많이 묻은 당신께
▦목욕의 신(하일권)
때를 민다는 행위를 통한 아스트랄한 세계의 체험. 도시의 삶을 꿈꾸며 서울에 올라온 스물셋. 돈을 빌린 개인 대부업자에게 쫓기는 도중 우연히 '금자탕'이라는 목욕탕에 몸을 숨긴다. 그곳은 럭셔리한 시설을 갖춘 최고의 때밀이 양성소. 우연히 금자탕 회장님의 등을 밀어주게 되면서 회장은 그가 '신의 손'을 가졌다며 때밀이 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한다.
▦테르마이 로마이(야마자키 마리)
목욕탕 건물을 설계하던 한 로마인이 타임슬립을 통해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의 목욕문화를 배우고 그것을 로마시대에 적용한다는 이야기로 황당하고 참신한 목욕 판타지를 선보인다.
오래된 고민을 가지고 있다면
▦닥터프로스트(이종범)
대학교 학생상담실을 배경으로 사고로 인해 공감능력을 상실한 천재 심리학자와 정 많고 오지랖 넓은 조교가 풀어나가는 사람 마음 속의 비밀. 심리학도 출신 만화가가 다수의 심리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완성도 높게 만든 작품이다.
대륙의 기상이 필요하다면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허영만)
칭기즈칸의 일대기. 남는 건 시간뿐, 긴 이야기를 다오. 작은 몽골 부족 수장의 아들로 태어난 한 소년이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군주가 되기까지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한 대서사시다.
무서운 게 없는 당신께
▦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이토 준지)
일본 공포만화의 대부의 섬뜩한 공포 단편 모음집으로 기괴함이 어우러진 극악의 공포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좋아할 것 같다. 반드시 아무도 없는 밤에 작은 조명 한 개만 켜 놓고 보시길 바란다.
20~30대 전후의 여성들에게
▦플리즈 플리즈미(기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20~30대 성인여성들의 사랑을 코믹하게 그려낸 국내 최고의 레이디즈코믹(성인여성을 대상으로 한 만화). 작가의 폭넓은 인생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깨알 같은 디테일이 진정성 있는 폭소를 자아낸다.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귀차니스트에게
▦다이어터(네온비, 캐러멜)
뚱뚱한 수지가 날라리 트레이너 찬희를 만나 건강하게 살을 빼고 예뻐지는 이야기. 날라리 찬희 역시 진정한 능력자 트레이너로 거듭난다는 어찌 보면 평범한 플롯이지만 암팡지게 재미있다(지방과 근육들의 상관관계를 어찌 이리 알기 쉽고 재미있게 표현했는지 스토리 작가는 정말 천재다!). 네온비의 실제 다이어트경험을 바탕으로 해 더욱 믿음(?)을 준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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