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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11> 구치소 접견실 - 두려움과 온기가 교차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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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11> 구치소 접견실 - 두려움과 온기가 교차하는 자리

입력
2012.08.0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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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된 이들이 지닌 거라곤 시간뿐이고 그 시간을 죽이는 게 일이라는 통념에 대해 추리작가 존 하트는 거꾸로 '시간이 사람을 죽이는 곳이 감옥'이라고 말했다. 이 두 견해는 하나의 진실을 나눠 가진 상반된 부분 진실의 예일 것이다. 성향이나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어떤 하나가 더 그럴싸해 보일 수 있고, 아침과 저녁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인(囚人)과 시간의 특별한 관계다. 0.87평의 공간은 육체와 함께 감각을 가둔다. 갇힌 감각은 경험과 기억을 통해 구속에 저항하지만 그 역시 시간 속에서, 육체와 함께 무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은 다르다. 시간감각은 자신이나 수감 동료의 재판 기일이나 남은 형기, 또 가족의 생일 같은 숫자와의 거리감으로 또렷해진다. 감각이 비워진 자리에 시간감각은 제 몸집을 키워 들어앉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수인과 시간은 서로를 의식하며 죽고 죽일 수도 있는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관계로 마주 선다.

그러므로 저 두 견해의 차이는 관점의 차이이다. 그것은 화자(話者)가 수인이냐 아니냐에 따라 갈릴 수도 있다. 바깥의 우리가 볼 때 그들은 시간을 죽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갇힌 자는 창살과 콘크리트 벽 안에서 시간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 죽음은 물론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닌 사회적 죽음이다. 감옥을 지배하는 시간이라는 살인자는 대상을 모든 인연들로부터 서서히, 집요하게, 물샐 틈 없이 배제해 나간다. 갇힌 이들은 자신이 점차 잊혀간다는 사실 죽어간다는 사실을, 조금씩 뜸해지는 면회나 편지의 횟수를 통해 실감한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그 추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려웠을 것이다. 하트의 말처럼, 감옥은 절망의 공간이 아니라 두려움의 공간이다.

두려움은 형이 확정된 이들의 거처인 교도소보다 미결수들이 머무는 구치소에서 제 위세를 떨친다. 그들은 유ㆍ무죄의 기로에 서 있고, 공포는 맞닥뜨리는 순간보다 예감될 때가 더한 법이니까. 구치소 접견실(면회실)은 그 두려움이 세상 밖으로 스며 나오는 창구다. 무죄를 강변해야 하는 법원이나 검찰 조사실에서, 그들은 대개 자신의 두려움을 감춘다.

"지들 쪄 죽을까 봐 그런지 오늘은 면회 오는 놈들도 별로 없네." 서울 남부구치소 정문 앞에서 만난 70대 여인은 아들을 면회하고 가는 길이라고 했다. 살짝 굽은 허리를 펴며 욕설처럼 내뱉은 그 말은 찌는 더위가 아니라 길동무 하나 없는 쓸쓸한 면회 길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아들의 두려움에서 갇힌 이들 모두의 두려움을 봤을지 모른다. 상처에 대한 감수성은 상황에 의해 훈련되기도 한다.

오후 6시, 마지막 면회객들이 떠난 접견실은 방학을 맞은 학교 풍경 같다. 텅 빈 복도를 따라 1~15번의 문패를 매달고 가지런히 도열한 텅 빈 방들. 반 평도 채 안 되는 공간 안에 의자가 있고 앉은 자리에서 가슴서부터 천장까지 막아 선 강화유리 벽. 그 너머에는 스틸 철창이 있다. 면회자와 수감자의 공간은 철창을 중심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마주본다. 김기덕의 영화 에서처럼 수감자가 입김으로 뿌옇게 된 접견실 칸막이 창에 자신의 마른 입술을 갖다 대거나 작은 구멍들 사이로 면회자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간직하는 장면은 10여 년 전에나 가능했을 풍경일 것이다. 유리 벽은 양 편 모두 수족관처럼 물샐 틈 밀폐돼 있다. 입김과 입김을 통해 전이되던 몸의 온기는 한 뼘 가량의 유리 벽 공간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은 육성이 아니라 마이크 일체형 스피커를 통해 전달된다. 면회 시간(7~10분)이 끝난 뒤에도 맞붙어 있으려는 이들을 끌어내곤 하던 수고 대신 교도관들은 이제 스위치만 톡 내리면 된다. 입회 교도관도 없다. CCTV로 영상계호를 하니까. 교정본부 홈페이지에 접속해 언제든 수감자에게 인터넷 서신을 보낼 수도 있고 전국 구치소 어디서든 신청만 하면 화상(畵像)접견도 가능해졌다지만 영화들이 전하던 예외적 온기는, 그래서 식은 듯 보였다. 그래도, 팽팽하던 두려움이 누그러지면서 발생하는 발효열만은 그 빈 공간 안을 감돌고 있었다.

면회는 구치소 수감자에게는 하루 한 차례, 기결수에게는 월 5회(수감태도 등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다) 허용된다. 수형 기간이 길어질수록 면회는 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구치소보다 교도소의 면회 횟수가 훨씬 적고, 형기가 긴 중범죄인들이 모이는 지방 어느 교도소의 경우 하루 면회가 서너 건일 때도 많다고 했다. 남부구치소에서는 하루 평균 500여 건의 면회가 이뤄진다. 그래서, 사람이 바뀌고 사연이 달竄??늘 왁자지껄 한결같다고 했다. "수감자의 아내라는 사람이 셋이나 한날 한시에 면회를 왔다가 접견 대기실에서 서로 머리 뜯고 싸우는 것도 봤어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이 집단으로 맞붙어 싸우는 일도 흔하고…, 온갖 별 일이 다 있죠."

"000번 면회~"

면회 통보를 받은 수감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7~10분의 만남을 위해 최선의 준비를 한다. 세수를 하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제 안색과 표정을 살피고, 수형복 맵시나 헤어스타일을 다듬는다. 부모나 아내(남편)나 애인이 걱정할까 봐, 마음을 더 아프게 할까 봐, 볼품없이 보일까 봐. 그래서 외면당할까 봐, 잊힐까 봐. 난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마라, 그나저나 너는, 집은, 식구들은? 변호사를 구해달라는 애원도, 더 나은 변호사를 알아보라는 호통도 있다. 그리고 저 모든 반응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서울구치소의 '특별한' 독방에서 지내고 있을 '특별한' 이들의 특별면회소 안 밀담도 그 점에선 별로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수형자들이 감당하곤 하는 잊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유일한 면회자인 노모의 죽음이나 배우자의 변심 같은 경우다. "남자친구와 함께 남편 면회를 와서는 자신과 아이들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라며 소개시키는 여자도 봤어요. 무슨 마음인지 몰라도 그건…."경력 30년쯤 된다는 그 교도관은, 그 순간과 이후 얼마간 수형자가 감당했던 잔인하고도 유구한 신파(新派)의 시간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외형으로 보자면 남부구치소(교도소)가 전형적인 수감공간은 아니다. 철조망은커녕 위압적인 높이의 빨간 벽돌 담장도 없다. 담장 자체가 없다. 대신 잘 조경된 너른 뜰이 4차선 도로와 닿아 있다. 정면 민원ㆍ행정동은 갓 지은 시립도서관쯤으로 보인다. 주변은 신도시풍의 아파트단지다. 주변 생활환경과 공존할 수 있는 시설을 짓겠다는 조건으로 지역 주민들을 어렵사리 설득해서 터를 잡은 결과라고 했다.

수형동은 그 평화롭고 일상적인 풍경 너머, 철저한 보안 속에 은폐돼 있지만 여건은 다른 데 비해 나은 편이라고 구치소 측은 설명했다. "운동장이 콘크리트나 아스팔트가 아니라 맨 땅이고, 모두 남향이라 햇빛도 잘 들고, 냉난방 등 시설도 모두 새 것이라…."구치소 관계자는 "개선된 수감 환경이 교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 수감시설이 조금 더 인간적으로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공간적 상상력 안에서 감옥은 상징의 흔한 도구다. 그리고 그 상징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수인(囚人)이다. 부모나 스승의 기대가 자신을 가두는 창살이 될 수도 있고, 생계와 일터가 감옥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 심지어 부부관계조차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될 때가 있고, 사적 자아와 괴리된 공적 자아의 윤리나 책무가 족쇄처럼 발목을 묶기도 한다. 그 상징의 감옥 안에서 상징적 수인인 우리는, 진짜 수인들과 반대로, 스스로를 잊기 위해 시간과 싸워야 한다. 풀려 있는 감각과 욕망을 스스로 제어해야 하고, 자의식을 최대한 억제하며 자신을 체제와 관계의 부속품으로 부려야 한다. 그 가혹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절망적으로 '패배'한 이들, 예컨대 저 서울구치소의 특별 독방 거주자들처럼 제 욕망의 노예가 되거나 남부구치소 0.87평에 갇힌 어떤 이들처럼 더는 물러설 데 없는 체제의 변방에서 딱 한 걸음 더 나아가버린 이들은 상징의 너울을 벗고 진짜 감옥에 간다. 그럼으로써 시간과의 새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수형번호로 바뀐 호명(呼名)의 순간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면회자와 수감자의 공간을 나누는 접견실의 유리 벽이 실은 현실의 감옥과 상징의 감옥을 양분하는 데칼코마니의 접힌 선과 같은 것이었음을 때늦은 두려움과 함께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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