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은 나이 열 다섯에 한 살 위 홍씨를 아내로 맞아 60년을 해로했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지만, 다산이 강진에 유배된 18년 동안 떨어져 살아야 했다. 다산은 57세의 반백이 되어서야 유배가 풀려 돌아왔다. 결혼 60주년을 축하해 자식들이 마련한 회혼례 잔치를 사흘 앞두고 다산은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
"육십 년 풍상의 바퀴 순식간에 흘러갔는데 / 짙은 복사꽃 피고 봄 정취는 신혼 때와 같구려 / 살아 헤어지고 죽어 떠남이 늙음을 재촉하건만 / 슬픔 짧고 기쁨 많아 임금 은혜에 감격하네 / 이 밤의 목란사 소리가 더욱 좋고 / 그 옛날 부인 치마의 먹 흔적은 아직도 남았네 / 나뉘었다 다시 합한 게 참으로 내 모습이니 / 두 합환주 잔 남겨서 자손에게 물려주리라"
하지만 다산은 잔칫상을 받지 못했다. 회혼례 당일 아침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부인홍씨는 그 뒤 2년을 더 살다가 다산의 묘에 합장됐다.
고생한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담은 이 시에서, '부인 치마의 먹 흔적'은 유배 시절 일화를 가리킨다. 결혼한 지 30년, 유배 7년째이던 해, 홍씨는 시집올 때 가져온 다홍치마를 강진으로 보내 그리운 마음을 전했고, 다산은 아내의 낡은 치마폭을 잘라 두 아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쓰고 곧 시집가는 딸의 행복을 빌며 매화와 새 그림을 그려 보냈다. 부부의 살뜰한 정과 아버지 다산의 다감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다.
다산이 못 받고 간 회혼례를 재현하는 행사가 경기 남양주의 다산 유적지에서 열린다. 다산 부부가 살던 집터에 지은 여유당 마당에서 4일 오후 4시 잔치가 벌어진다. 다산이 쓴 혼례 예법서 <가례작의(家禮酌儀)> 와, 회혼례를 그린 조선시대 그림 등을 살펴 고증해서 재현한다. 회혼을 맞은 남양주 지역 노부부 2쌍, 다산과 실학자들의 후손, 다문화 가정 부부 등 15쌍을 초청해 의의를 더한다. 가례작의(家禮酌儀)>
회혼례는 조선 후기에 성행했다. 평균 수명이 짧아 회혼을 맞는 일이 매우 드물던 때라 자손들이 기쁜 마음으로 차려드리던 잔치다. 늙은 부부는 혼례 복장을 갖춰 다시 혼례식을 치르고, 자손들은 모두 곱게 차려 입고 술잔을 올리며 춤 추고 어리광을 부려 부모를 즐겁게 했다.
이번 행사는 경기도와 남양주시, 실학박물관이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4, 5일 이틀간 다산의 고향인 남양주 마재마을에서 펼치는 '다산의 향연'프로그램 중 하나다. 백일장, 연극과 뮤지컬, 산대놀이, 음악회, 실학 퀴즈 등이 종일 이어진다. 5일 오후 4시 마재마을 철마산에서는 이 마을 사람들이 매년 봄 가을로 지냈던 산신제를 복원한 행사도 열린다. 다산이 남긴 기록과 전문가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재현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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