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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 부평초 하얀 꽃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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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 부평초 하얀 꽃 <90>

입력
2012.08.0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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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그이가 서일수라는 분인가요?

서 풍수라구 그랬으니 맞겠지요. 그분은 천지도의 대두 중 한 분일 거예요.

하고는 백화는 어쩐지 쓸쓸하게 나를 향하여 한마디 덧붙였다.

내버려두고 그냥 사시지…… 그 사람 아마 안 돌아올 거예요.

우리 셋은 모두 말이 없었는데 그녀가 현재의 자기 신세를 짧게 줄여서 말했다.

내가 이 댁을 떠났다가 서른한 살에 되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늘 눈에 밟혀서…… 이 집에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남기고 가셨더니, 가장 노릇을 해야 할 아드님은 갑오 난리 때에 어디서 흉한 일을 당했는지 돌아오지 않았지요. 저는 이 댁 딸을 친동생 삼아 제부도 보고 식구가 되었구요. 다행이 선생님께서 전장을 남기고 돌아가셨으니 얹혀서 밥술깨나 먹으며 살아가고 있답니다.

서 지사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알구 있나요?

내가 참다못해 백화에게 물었고 그녀가 말했다.

수십만 명이 죽은 난리를 겪고 살아남은 이들이 모두 숨죽이고 엎드렸는데, 어찌 그걸 물으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나를 꾸짖는 듯한 어조여서 그만 고개를 숙이고 앉았는데 눈물이 방바닥에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백화가 내 손을 끌더니 두 손으로 잡고는 토닥이며 말했다.

그이들과 연결이 됨직한 이를 내 동생이 알지도 몰라요. 더듬어 가노라면 신통이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소?

백화는 처음부터 말을 아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양에서 그가 이신통을 알게 되었던 사연부터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녁참이 되어 박돌 아저씨와 안 서방은 눈치도 빠르게 부안 읍내에 사처를 정한다고 나갔고 나는 백화가 끝내 만류하여 그 댁에서 함께 유숙하기로 하였다. 그 긴 밤 내내 그녀와 나는 단 둘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의자매가 된 손 선생의 따님이 하녀와 함께 술상을 보아 왔기에 여자들 셋이서 좀 취하도록 마셨다. 백화가 흥이 일어나 스스로 곡을 부쳐 불러준 기녀 이매창(李梅窓)의 시 몇 구절이 오랫동안 가슴 깊은 곳에 고여 있었다.

매창에 눈보라쳐 몹시도 쓸쓸하니

원한과 수심이 이 밤 따라 각별하다

다시 태어난 저승의 밝은 달 아래

바람소리 따라 영롱한 구름 속 님을 뵈올까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이

굶고 떨며 사십 년 길기도 하지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사는가

가슴 서글퍼 하루도 안 운 적이 없다네

부안에서 선비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나라를 등지고 뜻을 펴지 못한 사내들 몇을 겪고는, 죽어서도 오래도록 시인 묵객들은 물론 소리꾼 광대패들의 문안을 받고 매창이 뜸에 묻혔다는 그 백골의 슬픔을 내 어찌 알았으랴.

부안 손 선생 댁에서 이틀을 묵고는 이내 안 서방과 함께 강경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검은 구름이 오락가락 하더니 가을걷이가 끝난 쓸쓸한 들판 위로 흰 눈이 간간이 내렸고 오리들은 열을 지어 날아갔다. 집에 돌아와 다시 그 이야기들을 잊기 전에 적어 나갔다.

서일수가 느닷없이 사라진 뒤에 이신통은 여전히 전기수로 문안을 드나들며 애오개 주막집에서 혼자 기거를 했다. 그가 애오개 놀이패의 모갑이 박삼쇠와 만나게 된 것이 군란 나던 이듬해 정월이었다. 박삼쇠는 원래가 방짜 유기공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제 집을 드나들며 방짜 징과 꽹과리를 맞추어 가던 놀이패들과 어울렸다. 그는 처음에는 선대로부터의 천직이었던 유기장이를 본업으로 하고 겨울철에만 사계축 놀이에 나서더니 흥이 과했던지 아예 놀이패 상쇠로 나섰고 잡가를 배웠다. 이신통이 그를 만났을 때 이미 그의 나이가 마흔 가까웠으니, 기량이 한양 도성 밖 놀이패들을 모두 묶어서 일컫는 사계축패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소리꾼이었던 것이다. 때는 눈보라 치고 매섭게 추운 겨울이라 신통은 도심의 거리에서 책을 읽는 일은 작파하고 따뜻한 봄날이 되기를 기다리던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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