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포함한 '동네 아저씨'를 대하는 세상 눈길이 많이 싸늘하다. 치가 떨리는 끔찍한 성범죄가 잇따라 '동네 아저씨' 소행으로 드러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언제 특정 인물과 그가 속한 집단, 또는 그 집단에 속한 다른 개개인을 합리적으로 구별하려고 제대로 애쓴 적이 있었나. 그냥 뭉뚱그려 하나로 보는 게 훨씬 마음 편하지 않았나. 그런 사회에서 일부 '동네 아저씨'의 잔혹한 범죄로 빚어진 경계심이 모든 '동네 아저씨'에게 꽂힌다고 이상할 게 없다.
잔혹한 성범죄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뒤흔들었는지는 예방책과 형사처벌 수위의 거듭된 상향 과정에서 최소한의 반론조차 눈에 띄지 않은 것만으로도 확연하다. 성범죄, 특히 아동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예의 '범죄자 인권보호' 논의마저 실종됐다. 성범죄 전과자의 인적 사항을 사진과 함께 인터넷으로 공개하는 것부터 아동이나 장애인 대상 성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그만큼 아동이나 장애인 대상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반감과 피해 가족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연민이 큰 때문이다.
아동이나 장애인 대상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일반적 성범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은 두터운 보호를 받아야 할 가장 약한 존재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강간이나 추행이 가장 크게 침해하는 피해자의 법익이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면, 아동이나 지적 장애인은 '자기 결정' 여부를 거론하기도 힘든 특별한 존재다. 전국 각지의 '발바리'가 동네 여성을 불안에 떨게 했지만, '동네 아저씨'처럼 피해자 주변을 넘어 사회 전체에 극단적 혐오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사내아이로 태어나 중년이 되기까지 상상 속에서 온갖 성적 욕구에 시달렸지만 솔직히 아동 성범죄자의 욕구에 대해서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도착증자나 변태 이야기를 읽어도 마찬가지다. 사회로부터의 격리 외에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 '경계 밖의 예외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아동ㆍ장애인 대상 성범죄의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예외자'에 머물지 않고 멀쩡한 '동네 아저씨'에게 퍼지는 듯한 조짐이다. 여러 요인과 그에 따른 갖가지 대책이 지적될 수는 있다. 다만 남자로서, 또 아들만 둘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꼭 필요한 대응책 하나를 우리사회가 빠뜨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바로 '아들을 사내답게 키울' 필요성이다.
'남자는 다 짐승'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모든 남자에게 강한 공격성과 무제한적 성적 욕구를 안긴다. 다른 포유류 동물의 수컷과 조금도 다르지 않도록 충동질하는 유전적, 생물학적 명령체계다. 그런데 인간 수컷이 생물학적 명령에 충실해서는 사회 유지에 불가결한 규범과 충돌한다. 다행히 이런 생물학적 명령을 완화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응책이 개발돼 왔고, 형벌도 개중의 하나다.
그러나 성범죄 예방에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은 형벌의 '위하(威嚇)효과'보다는 윤리적 자각이었다. 유전자의 명령을 제약할 정도로 강력한 윤리적 자각이 그저 얻어졌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정교한 욕구의 교환 체계인 사회 안에서 성현의 말씀만으로 '수컷'을 교화할 수는 없다. 반대 급부로서 '수컷'에게 주어진 것이 사내다움에 대한 자부심이다. '사내'의식은 '수컷'과 달리 생물학적 역할보다 사회적 역할에 치중한다. 그에 대한 자부심이 남성의 권위를 슬쩍 인정하는 척했던 여성들의 속임수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그런 허망한 권위와 자부심의 대가로 여성을 비롯한 약자를 배려할 윤리적 책무와 자기희생 의지에 불탈 정도로 남자는 멍청하다.
사내다움을 잃어버린 남자는 '수컷'에 불과한 사회적 위험요소다. 아들을 사내답게 키우는 게 사회적 과제인 이유다. 아울러 사내다움이 여성다움의 대칭점이란 점에서 양성 평등과는 별도로 딸을 여성답게 키우려는 '협력'도 필요하다. 아들과 딸은 정말 다르니까.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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