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서방님이 잘 다니던 곳이나 친한 사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박돌 아저씨, 저를 부안 그 여자에게 좀 데려다주시지요. 사례는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박돌은 펄쩍 뛰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여? 지금 우리 놀이패는 농한기가 대목인데 내가 약계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세.
부안에도 갈 작정이겠지요?
그야, 동지 무렵에나 가볼까 하는데…… 정월대보름 놀이는 물론 갱갱이에서 놀겠지만.
한 사흘만 저를 위해 내주셔요. 하루 열 냥씩 삼십 냥 드릴게요.
박돌은 내 제안을 듣고는 눈을 감고 상반신을 좌우로 흔들며 생각해보는 척하다가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아따, 어쩔 수가 없구먼. 낼 놀이판이 인월장인데 모갑이한테 맡기고 다녀오도록 함세.
남원서 부안까지는 어차피 하루 반이나 넉넉잡고 이틀길이 되는 셈이었다. 내가 안 서방에게 임실에서 강경으로 돌아가라 했건만 그는 끝내 부안 들렀다가 강경에까지 모시고 가련다고 우겨서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태안에서 민가의 방 한 칸을 빌어 숙식하고는 다음날 점심 무렵에 부안에 당도했다. 소싯적부터 이곳을 드나들어 잘 알고 있는 박돌이 있어서 우리는 느긋하게 현의 읍내로 들어섰다. 상소산 아랫녘 소나무 숲속에 토담이 둘려 있는 일자의 기와집 한 채에 초가지붕을 얹은 제법 큰 별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있는 곳이 손동리 선생의 유택이었고 소리꾼 백화는 그 댁을 지키고 있었다. 솟을대문 앞에 이르러 나는 하마했고 앞장서 찾아간 박돌이 사람을 부르니 하녀가 나와서 대문을 열어주며 그들을 맞았다. 안으로 들어갔던 하녀가 다시 나와서 세 사람을 별채로 안내했는데 집 앞으로 달린 긴 툇마루에 여인이 나와서 내다보고 있었다.
저 박돌이외다. 그간 평안하신지요?
이게 웬일이오? 여기는 어이 알고 찾아오셨소?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여인을 살펴보며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얼굴 모습은 몰라도 입고 있는 옷차림이 꿈에서 본 것처럼 남치마에 흰 저고리였고 쪽진 머리의 비녀도 푸른 옥비녀였다. 백화는 박돌 아저씨의 기억에 의하면 이신통보다 두 살이 위였다고 하니 지금 서른여섯일 것이다. 그의 출신이 원래 기녀였다지만 지금 보니 어느 양반댁 부인처럼 기품이 있어 보였다. 얼굴은 볼이 통통하고 둥근 형이고 가느다란 쌍꺼풀눈은 길고 입술은 도톰하며 조그맣다. 그녀도 나를 잠깐 바라보았다.
어서들 올라오시지요.
모두 방에 들어가 앉으니 병풍이 쳐진 방 뒤에 장지문이 보였는데 그 뒤에 연달은 방이 있는 것 같았다. 방 안에 화로가 있고 작은 탁자와 한쪽에는 가야금과 장구와 북이 놓였다. 백화는 웃음을 머금고 우리를 차분하게 둘러보았다. 박돌이 얘기를 꺼냈다.
이신통이를 기억하지요?
백화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박돌이 연이어 말했다.
이 사람은 신통이의 내자입니다.
나는 박돌 아저씨가 소개를 하자 마자 앉은 채로 두 팔을 방바닥에 짚고 상반신을 숙여 반절을 올렸다.
박연옥이라 합니다.
그녀는 당황했는지 뒤늦게 자세를 바로 하고 맞절하며 중얼거렸다.
심백화요.
하고는 잠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웃음을 머금은 처음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 댁 서방님은 별 무고하신지요?
박돌 아저씨가 이제는 서슴치 않고 내지른다.
별 무고가 다 무어요? 그 사람 갑오년 난리 때에 공주 우금치에서 다 죽게 된 것을 살려 놓았더니, 어디로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 소식이 끊긴 지 두 해가 지났다는구려. 내 하도 사정이 딱하여 이리저리 함께 찾아다닌다오.
저도 그이를 본 것이 십 년 전의 일입니다. 다만 그이의 소식을 들은 적은 있지요.
그게 언제죠?
갑오 난리 전해인가 우리 집 가장이 그를 잘 안다는 지사를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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