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주막에서 국밥 먹고 얼른 출발하여 정오 지나 임실에서 다리쉬임 겸하여 메기 어죽으로 요기하고, 다시 부지런히 교룡산성 밤고개를 넘으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남원부의 성내에 당도했다. 안 서방이 상단을 따라다닌 경험이 많으니 우선 남원에서도 행객이 많이 모이는 광한루 건너편 주막거리로 말을 이끌었다. 한 주막에 들어가 말을 묻더니 대번에 광대패가 묵는다는 객점을 찾아냈고 요천이 내다뵈는 길가에 있는 집으로 찾아들었다. 어둑어둑한데 마당에 멍석 깔고 저녁을 먹던 이들이 상을 물리는 판이었다. 제각기 마루로 올라가거나 방문을 열어젖히고 방문턱에 앉아 있기도 했다. 상을 치우며 오가던 여자가 말을 끌고 문으로 들어서는 그들에게 대뜸 말했다.
방 없어요.
아니, 봉노도 없단 말요?
안 서방이 물으니 뒷전에서 사내가 대신 말한다.
봉노야 있지만 부인 손님을 재울 수야 없지 않겠소?
듣고 보니 딴은 그러하였다. 안 서방은 그가 주인인가 싶어서 다시 묻는다.
이 집에 박돌이란 손님이 들었소?
주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마루에 앉은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마당을 내다보았다.
아니, 일전에 우리가 전주서 부딪치지 않았나? 왜 자꾸 따라댕기며 안달이여?
그는 껄껄 웃으며 안 서방을 반기더니 이내 뒤에 섰던 연옥을 알아보자 눈치를 채는 거였다.
아이구, 내 주둥이가 오두방정이로다! 연옥이 자네가 여긴 또 무슨 일여?
연옥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안 서방이 말했다.
이 집에 방이 없다니 우린 쫓겨나게 생겼소.
괜찮우, 어서 올라오셔. 우리 방이 있으니 같이 쓰면 되지.
남도 일자집의 부엌 앞방을 광대물주인 박돌이가 패거리의 모갑이와 함께 쓰고 있던 참이라 낭패는 면하게 되었다. 그를 일행들의 봉놋방으로 보내고 마주앉으니 주인이 와서 저녁밥을 주문받아갔다. 남원이 워낙에 산과 들의 진미가 나는 곳이라 저녁밥상도 칠첩이나 되게 반찬이 많았다. 등잔불 아래 저녁을 먹고 나자 사내들은 곰방대를 내어 피우고 연옥은 뒤뜰로 나가 세수하고 발 씻고 돌아오니 이미 그 사이에 안 서방의 말이 있었던지 박돌이 수걱수걱 시키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낸다.
참으로 내가 지난번에는 구례댁과 연옥이 낯을 보아 차마 얘기를 꺼낼 수가 없더구먼. 내야 깊은 사연은 잘 모르지. 내가 천안에서 신통이를 만날 때부터 일행이 있었거든. 단가와 가곡에 능한 소리꾼이 그들 패거리에 있었는데 나중에 그가 남장 여광대 백화라는 걸 알았지. 신통이 애오개 패거리와 헤어지고 우리와 합대할 적에 백화도 그를 따라 한 식구가 되었네. 두 사람은 우리 패와 일 년 넘게 남도를 돌아다니다 헤어졌지. 부부 광대로 알려졌는데 신통이 명고수라면 백화는 참으로 여명창이었다네. 광대들의 스승이고 귀명창인 부안의 손동리 선생이 있잖은가. 그분이 세상 떠나시기 두 해 전에 백화의 재간을 보고 소리를 가르쳤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이신통이가 그분께 맡기고 떠났다는 얘기도 있고 백화가 신통이를 버렸다는 말도 들리고, 어느 것이 정말인지 나두 모르지. 내 알기로는 백화가 사대부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명창 노릇을 하며 떠돌다 갑오년 이후로 스승의 위패를 모시련다고 부안에 다시 내려온 모양일세.
그 뒤에 우리 서방님이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내가 묻자 박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야 알 수 없지만 아마 못 만났을 걸세. 그런 난리통에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진 집이 한둘이 아닌 터에 아무리 신통방통하다 하여도 경황이 없었을 테니까.
안 서방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이 서방이 아씨를 만나기 전의 일이고, 이제 헤어진 지 십 년이 넘었거늘 그 여자를 만나본들 뭐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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