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 머나먼 러시아

입력
2012.07.31 12:09
0 0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던 이범진(1852~1911) 주러 대한제국 공사는 본국으로부터 느닷없는 소환명령을 받는다. 한일의정서 체결로 조선과 일본이 한편이 됐고,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 중이니 조선도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끊으라는 일본의 강압에 따른 지시였다. 하지만 아관파천을 이끈 대표적 친러파인 그는 소환에 불복해 현지에서 러시아의 힘을 빌어 반일(反日) 외교에 나선다. 아들 이위종(1887~?)이 참여한 헤이그 밀사 활동을 지원한 것도 그 하나다.

물론, 망국으로 기우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후원이 오래 갈 리는 없었다. 러일전쟁 후 밀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본의 자유활동을 보장키로 한 러시아에겐 이 공사의 존재도 점차 희미해졌다. 러시아 외무부는 그를 외면했고, 월 100루블씩 나오던 지원금도 끊겼다. 마침내 그는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새해 초 정오 무렵 서재에서 목을 매 스산한 자결로 파란만장한 생을 버린다.

아련한 고 이범진 선생의 비극을 새삼 떠올리는 건 다음달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우리와의 관계 증진을 부쩍 강조하고 있는 러시아의 분위기 때문이다. 뒤늦게 APEC에 합류한 러시아가 처음으로 의장국이 되어 치르는 이번 정상회의는 푸틴 대통령의 야심 찬 동진(東進)정책을 상징하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사실 2009년 마련된 '극동지역 사회경제 발전전략'에 따른 일련의 장기부흥계획을 의미하는 동진정책은 러시아 내 동서 균형개발 및 극동지역의 인구유출을 막기 위한 것이다. 바이칼호 인근 교통요지인 치타에서부터 동쪽으로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는 러중 국경지역의 중국측 인구는 2억명에 달하는데 비해, 러시아측 인구는 최근 20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해 80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국경무역이 빈번한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인 남성과 러시아인 여성이 결합한 다문화가족도 300만 가구에 이르는 등 중국세의 확산은 내심 러시아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향후 극동개발에 국경이나 과거사 문제가 얽혀 있는 중국, 일본 보다는 우리나라의 참여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러시아가 시베리아와 남북한을 잇는 한반도종단 가스 파이프라인 사업 추진을 위해 약 12조원에 이르는 구 소련에 대한 북한 채무 대부분을 탕감한 것이나, 블라디보스톡에 우리측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것에도 그런 지정학적 배경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극동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은 우리에게도 전략적 이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연해주 지역의 투자기반은 장기적으로 대륙시장 확대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음은 물론, 통일외교에서도 의외의 긍정적 국제 역학을 조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블라디보스톡 개발을 포함한 러시아의 동진정책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느냐다. 모스크바에서는 "표트르 대제 이래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역사는 서유럽에 다가가려는 안간힘"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 말엔 푸틴 대통령의 최우선 현장은 역시 유럽이며, 동진정책이니 극동부흥이니 해도 본질적으론 낙후지역 개발계획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냉소가 담겨 있다.

러시아 측은 "한국은 극동지역 무역의 30%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면서도 투자는 1%에 머무르고 있다"는 불만을 자주 제기한다. 하지만 국내 연구기관이나 업계에서는 "러시아정부와 유기적으로 연계된 구체적 개발계획이 없다"거나 "확고한 투자보장책이 미흡하다"며 여전히 극동지역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구한말 러시아의 동진정책을 믿고 어정쩡하게 손을 잡았다가 버려진 우리의 역사적 상흔 속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머나먼 나라다. 우리가 극동지역 협력에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러시아의 보다 진지하고 성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