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최고 지도자가 대내 공식행사에 부인과 동행하지 않는다. 국가 지도자가 공식행사에 부인과 함께 참석하는 것은 선거가 일상화한 서방세계의 정치문화다. 선거에서 표를 얻을 필요가 없는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에게는 부부동반 행사 참석과 같은 이벤트를 벌일 이유가 없다. 구소련의 역대 서기장들이나 중국, 베트남의 주석이 공개행사에 퍼스트 레이디와 동행한 예가 없다. 구소련을 개혁ㆍ개방으로 이끈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부인 라이사 여사를 대내외 행사에 동반한 것은 예외일 뿐이다.
김일성, 김정일 시절의 북한에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북한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이 공식 행사에 부인과 함께 참석하기 시작한 것은 대단한 파격이다. 남한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사건이다. '김정은 원수 부인 리설주 동지'는 미인이다. 행사 성격에 맞춰 그때그때 세련된 양장을 선 보였다. 패션계에서는 그 스타일을 품평하느라 떠들썩한데,'청담동 며느리' 스타일에 가까운 패션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고르바초프의 부인 라이사 여사나 생전의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의상은 전 세계 패션계의 화제를 모았다.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도 그와 비슷한 화제와 관심을 몰고 올지 모른다. 남편이긴 하지만 '인민의 어버이'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절대적 지도자의 팔짱을 스스럼 없이 끼거나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북한 퍼스트 레이디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다. 이제껏 그런 장면을 보지 못한 북한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일 게 분명하다.
김정은이 4월 15일 김일성 탄생 100돌을 맞아 선보인 첫 공개연설을 필두로 파격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고위간부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거나 미국 할리우드 영화'록키4'의 장면과 주제곡이 연주된 모란봉악단 공연 관람 등은 아버지 김정일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자신의 후계체제 구축 공신이지만 군부강경파를 대표하는 리영호 총참모장을 하루 아침에 숙청해버린 것도 파격적이다.
김정은의 파격 시리즈는 자신과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바꾸는 데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다. 부인과 팔짱을 끼고 현장을 방문하고 고위간부들과 놀이기구를 타는 그의 모습에서 핵과 미사일로 남한과 세계를 위협하는 불량국가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세습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많이 희석됐다. 그는 중고등과정 4년 반 동안 스위스 유학을 통해 서구문화를 경험했다. 외부세계가 그의 서구문화 경험과 최근 일련의 파격 행보를 연관 지어 개혁개방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내부적으로도 주민들에게 후계체제의 안정감을 과시하면서 주민 친화적인 이미지를 부각하는 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질 리는 없겠지만 체제 안정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 우리 대선주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미지 정치를 김정은 체제도 잘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북한의 선전선동부야말로 이미지 정치의 최고수들이다.
김정은이 이미지 정치의 수준을 넘어 진정한 개혁개방으로 나아갈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개혁개방은 결국 시장의 확대를 의미하는데 김정은 체제는 그럴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경제관리방식을 준비 중이라고 하지만 집단주의와 수령체제가 그대로인 한 극히 제한적으로 시장과 자율을 허용하는 수준일 것이다. 그런 정도의 시도는 김정일 시대에도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정은이 서구 정상국가의 지도자 면모를 추구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가 비공개 특별열차 여행을 고집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공개된 일정에 따라 비행기를 타고 퍼스트 레이디를 동반해 중국이나 러시아 방문 길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정상적 지도자의 면모가 쌓여간다면 어느 순간 북한도 정상 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지 않을까.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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