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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 부평초 하얀 꽃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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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 부평초 하얀 꽃 <87>

입력
2012.07.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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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안 서방에게 말했다.

전주 가서 박돌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든 앞세워서 부안까지 가볼 참이에요. 그러면 막음이 아부지는 부안까지 가실 필요가 없고.

시월 말 대설(大雪) 지나서 나는 안 서방과 함께 집을 나섰다. 새벽에 세마를 내어 안 서방이 견마 잡고 타고 갔는데 전주까지 하룻길에 당도했다. 어릴 적에 자란 곳이라 성문과 거리 곳곳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자꾸만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남문 안 주막거리로 들어가니 안 서방이 늘 다니던 길처럼 곧장 토담을 두른 널찍한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중노미 아이가 우리를 맞았고 방을 정하기 전에 주인을 불러 박돌의 행방을 묻자 주인이 말했다.

지금 박돌네 패거리가 남원에 나가 있을걸.

며칠이나 되었소?

들락날락하면서 인근 고을을 돌아다니며 놀더니, 엊그제 하룻밤 묵고는 남원에 약계가 되어 있다며 떠났소. 아무튼 다시 돌아오기는 하겠지요.

낭패가 되었지만 그래도 전주서 남원까지가 지척이라 그 주막에서 하루 자고 이튿날 바삐 쫓아가기로 하였다. 말을 타고 왔는지라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꿈은 왜 그리 많던지 밤새 잠자리가 뒤숭숭하였다. 기중 가장 선명한 꿈이 있었다. 모처럼 이신통이 보여서 이게 꿈이지 싶으면서도 어찌나 반가웠던지 깨고 나서도 한동안 눈을 뜨지 않고 기다렸다. 그가 어둠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랜 후에 딱딱한 목침 위에서 고개를 돌리니 뺨에 번진 눈물이 저고리 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때의 그 모습대로 패랭이에 검정 덧저고리 걸치고 다리에 행전 치고 등에는 괴나리봇짐 지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것이었다. 내가 제자리에 오금이 저려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바라보노라니 신통은 미끄러지듯이 내 옆을 스윽 지나쳐가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서방님, 어디 가시오?

그의 소매라도 잡을 양으로 손을 뻗쳤지만 그는 바람결같이 내 곁을 빠져나갔다. 내가 돌아서서 그를 향하여 걸음을 떼려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통은 어느 틈에 저만치 멀어져서 햇볕을 바라고 가는데 이쪽에서는 검은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다.

서방님!

언덕을 허위허위 넘어가니 내리막길 저 앞에 개천이 보이고 외나무다리가 걸쳐 있다. 그는 성큼성큼 다리를 건너갔고 나는 뒤늦게 언덕을 내려가 다리 앞에 이르렀는데 저 맞은편에서 그가 나를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었다.

왜 나를 찾소?

그의 물음에 나는 꿈속에서도 그게 무슨 말인가 떡인가 원망하는 마음이 들어서 냅다 소리질렀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야, 몰라서 묻는 거야?

신통은 다리 앞에 서서 잠시 대답이 없더니 내 곁을 떠나며 그랬던 것처럼 단정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더니 그대로 주저앉으며 무릎을 꺾고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등을 돌리는데 곁을 보니 웬 여인이 따르고 있었다. 쪽진 머리에 옥비녀 꽂고 남치마에 흰 저고리 입은 여인이었는데 이쪽에서는 등만 보일 뿐이라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시샘에 분이 치올라서 바삐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딛고 아래로 떨어지는데 한 키도 못 되던 개천이 얼마나 먼지 한참을 허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드디어 물에 닿아 첨벙하며 빠지자 마자 잠이 깼던 터였다.

창문이 부옇게 날이 샜는데 나는 더 이상 잠이 들지 않아서 전전반측 돌아누우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보았다. 아, 시샘하지 않으련다. 신통이 이미 전생이라 할 초년에 장가들어 어엿한 조강지처가 있었고 그에게 지선이라는 딸까지 있건만, 백화는 또 웬 인연이란 말인가. 그들 모두 자신이 그를 만나기 이전의 인연이었으니 그것도 자신의 일부분이 될 수 있으리라. 내게 그들 모두의 기억이 머리카락과 손톱처럼 내 육신과 마음의 한 부분이 되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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