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 하루 이용객 수가 2001년 개항이래 최고치를 경신(7월 15일, 12만5,900명)했고 그 기록도 8월 어느 날이면 또 깨지리라 장담하는 공항공사의 보도자료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공항버스에 오른 것은 무더위가 기승이던 지난 주말이었다. 세상을 온통 눅진하게 적셔놓은 장마는 끝났으니 이제 당분간 불볕 더위를 각오해야 한다는 풍문, 이 습한 더위로부터 일단은 무조건 벗어나고 보자는 마음이 그 선택을 부추겼을 것이다. 리무진 공항버스는 그 윤택한 이름에 걸맞게 쾌적했다.
'당신에게 공항은 어떤 공간이냐'는 질문에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들은 제 성향의 일부를 도식화하는 데 꽤 유효한 정보를 제공할지 모른다. 만남과 이별이라는 극적이고 낭만적인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고, 도전적인 패션과 자유롭고 관능적인 여유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는 면세 쇼핑몰의 유혹이나 낯선 도시에서의 낯선 만남을 조심스럽게 그려보는 이도 있을 수 있다. 벤티 사이즈 스타벅스 커피와 아이패드가 등장하는 역동적 비즈니스의 글로벌한 동선을 떠올릴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구처럼 지루한 기다림과 성가신 출입국 절차를, 또 어쩌면 외롭고 막막했던 지난 시절의 어떤 순간을 떠올릴 수도 있다. 자유 여유 낭만 동경 진취성 역동성…, 저 모든 인상들이 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 즉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알게 모르게 훈련 받은 결과일 뿐이라고 삐뚜름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실내 단일공간으로 공항 터미널만큼 웅장한 공간감을 드러내는 곳은 드물다. 자연 채광의 유리 외벽도 공간의 외연을 감각적으로 넓히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 공간이 예사롭게 느껴질 만큼 1층 입국라운지는 붐볐고, 입국 게이트 앞은 무슨 구경 난 듯 인파로 북적였다.
공간 꾸밈새도 마당극 공연장 같다. 입국자들이 들어서는 간유리 자동문을 마주보는 자리에 나무 난간이 완만한 부채꼴로 펼쳐져 마중 나온 이들을 10m쯤 물러서 있게 돼 있다. 그 거리는 입국자와 출영자가 서로를 식별하는 거리이고, 더러는 만남의 순간을 위해 예비했을 표정이 맥없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험하는, 그래서 왈칵 벅찬 울음을 터뜨리게도 되는 극적인 거리다. 그 거리공간 안에서 뜨거운 대면의 의식들이 표정과 몸짓을 통해 다채롭게 펼쳐진다. 인천공항에는 요즘 매일 각 300여 편의 여객기가 뜨고 내린다.
60대쯤으로 보이는 한 부부는 두리번거리며 입국장을 들어선 젊은 내외의 인사에는 아랑곳없이 남자 품에 안긴 핏덩이 같은 아이의 눈 감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빼앗듯 보듬은 포대기. 젖어들 듯 촉촉해지는 시선. 어쩌면 그는 그 순간 그렇게, 오호츠크해의 갯내 밴 자신의 귀한 손자 혹은 손녀와 처음 상면한 것일지 모른다. 다른 세 곳의 입국 게이트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손자나 조카, 예비며느리나 사위, 사진과 편지로만 서로를 알아오던 미지의 친구와 서먹한 악수를,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을 것이다. 단체여행객으로 보이는 10여 명의 일본인 중년 남녀들은 안내 깃발을 든 여행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 터미널 바깥으로 지체 없이 이동했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입간판부터 낯선 공항과 도시의 풍경보다 인솔자의 깃발 혹은 동행의 꼬리를 놓치면 낭패라는 서툰 긴장이 엿보였다. 입국장 바깥에는 크고 작은 승합차들이 솔개구름 하나 없이 찌는 하늘 아래 줄지어 서 있었다.
3층 출국 터미널은 입국장에 비해 훨씬 번거롭고 기능적인 공간이다. 미리 줄 서서 예약해 둔 탑승권을 받아야 하고 짐도 부쳐야 하고 덜 챙긴 물건이라도 있으면 쇼핑도 해야 한다. 오래 떠나있을 길이라면 친지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작별의 아쉬움과 가벼운 축복, 또 새로운 만남의 기약을 전화로라도 나눠야 한다. 그래서 출국 터미널은 입국 터미널에 비해 넓고 더 번잡하다. 항공사별 발권 및 탑승수속 동들이 지하철 역사 세 개쯤 이어놓은 듯한 공간 안에 줄지어 있고, 중앙에는 넓진 않지만 약이나 옷 등을 파는 간단한 쇼핑 공간도 마련돼 있다.
몇 칸 건너 '비싼' 승객들의 한적한 줄을 흘깃거리면서 언제 끝이 보일지 모를 긴 줄을 지켜 탑승권 받고 짐을 넘기고 나면 여행객들의 표정은 표나게 여유로워진다. 여행 팸플릿이나 일정표 등을 펼쳐놓고 오래 별러왔던 여행의 시작을 실감한다. 날은 어느 새 뉘엿뉘엿하지만 새로 장만한 선글라스를 써보기도 하고, 아직은 어색한 열대 풍 홀터넥 드레스 매무새를 다듬으며 동행자와 얼굴 맞대 사진을 찍기도 한다. 몇 시간 뒤면 사진의 배경이 아열대의 호젓한 바다나 운치 있는 이국의 고궁 뜰로 바뀔 것이다. 휴가 성수기라 그랬는지 대부분 여행자인 듯 여겨졌다. 하지만 그 중에는 몇 년만의 가족 상봉 기대에 부푼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도 있을 것이고, 가족에게 '돈 벌어 오겠다'는 약속을 남겨둔 채 마지막 재기의 희망을 찾아 여행객 틈에 껴 앉은 가장이 있을 수 있다.
출국장 입구는 입국장과 달리 사무적이고 밋밋하다. 여름 바닷가 간이 탈의장처럼, 실제 입구는 좁은 통로를 따라 선 불투명 유리 벽으로 가려져 있다. 내딛는 걸음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일깨우듯, 또 새로운 출발이니 감상(感傷)은 금물이라 다짐받듯. 한 노년의 남자는 자녀와의 기약 없는 이별이 아쉬운 듯 입구 간유리 틈 사이에 눈을 붙이고 서 있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있을 혈육의 뒷모습이라도 좀 더 봐두겠다는 것일까? 보안요원은 보고도 못 본 체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공항의 진짜배기 기능은 게이트 너머에서 수행된다. 입ㆍ출국 자격을 심사하고, 소지품과 몸 속까지 살피고, 이동 목적과 체류기간 묵을 곳 등 사적인 영역 전반을 초정밀 장비와 체제로 스캐닝한다. 심사대 위에는 지갑 뿐 아니라 우리의 국적과 피부색, 지나온 삶의 내력까지 보이지 않는 평가 요소로 얹힌다. 그렇게 우리는 공항에서, 국가의 '국민'에 대한 장악력과 '지구촌'이라는 수사(修辭)의 위선을 새삼 절감한다. 그 실감의 정도는 내가 속한 국가(혹은 인종)와 목적지 국가가 이 지구촌 안에서 차지한 자리의 고도 차에 대체로 비례한다. 그렇듯 개인을 집단으로 묶는 엄청난 제도의 끈과 장애들이 극명하게 작동하는 공항에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공항이 누리는 저 우아한 인상들은 저 아이러니 위에 펼쳐진 신기루 같은 걸지도 모른다.
터미널 4층 공항전망대는 탑승동 너머 항공기 계류장까지 조롱박처럼 파고들어 앉아 있다. 출국 심사를 통과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심리적 국경 너머를, 유리 벽과 바닥으로 막혀있긴 해도 어쨌든, 공간적으로 넘나들 수 있는 일종의 경계지대다. 거기서는 세계 공항 면세점 최초 입점이라며 자랑하며 공항공사가 면세 몰 입구 정면에 모셔온 한 명품 브랜드의 거대한 매장도 볼 수 있고, 몰을 따라 물길처럼 엇갈려 흐르는 출국자들의 쇼핑 행렬도 구경할 수 있다.
유리 벽 너머 계류장에는 보잉 시리즈의 육중한 동체들이 비좁은 연못 안에 갇힌 잉어들처럼 줄지어 꿈틀대고 있다. 이륙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동체들은 관제탑 너머 제게 할당된 활주로를 향해 백 밀러도 없이 바장이듯 움직이거나(taxing) 코딱지만한 견인차(towing car)에 끌려가기도 한다. 뒤로는 2,130만㎡(약650만평) 부지 위에 요염하게 누운(선 것이 아니라!) 4층 규모의 투명 여객터미널과 탑승동이, 앞으로는 광활한 활주로가 서해 노을 갯벌을 가로지르며 아득한 수평선까지 뻗어 있다. 서늘한 남반구로나 가는지 신이 난 여객기 한 대가 이륙전환속도를 넘나들며 혼신을 다해 그 활주로를 내닫고 있었다.
터미널 지하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는 공항철도는 서울 도심과 공항을 잇는 가장 경제적인 교통수단이다. 폭 10m도 안 되는 역 승강장 위에서는 출국하려는 이들과 막 입국한 이들이 수시로 뒤섞인다. 1년 분의 '여유'를 한 방에 털어 쓰고 온 이들의 뿌듯한 표정 뒤에 스민 허전함과 그 '여유'를 만끽하자고 어렵사리 작정하고 나선 이들의 기대 안에 스민 막연한 긴장과 동요는, 표정으로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 표정들은 갯물에 섞여 드는 강 하구 풍경처럼 왠지 쓸쓸하고 덧없어 보이기도 했다. 회귀와 반복. 공항의 예외적인 존재감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상의 질긴 인력.
그래도 우리는 또 언젠가, 지금 여기서는 누릴 수 없을 것 같은 뭔가를 기대하며, 누군가와 저렇게 엇갈려 떠나고 또 돌아올 것이다. 어쩌면 공항 터미널 3층 버스 승강장에서 202번이나 222번 버스를 타고 한적한 바닷가에나 가서 꽃노을 자르며 나는 비행구름이나 실컷 바라볼지도.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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