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이 군 입대를 앞둔 겨울 끝자락에 제주 올레를 찾았다. 인적 드문 적요한 길을 닷새 동안 가족이 함께 힘들여 걸었던 경험은 이전 여행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각별한 것이었다. 그 느낌을 <지평선> 칼럼(2010년 2월8일자)에다 썼다. 지평선>
'… 일상이 답답해지면 툭 털고 떠나 한번쯤 그 길을 걸어볼 일이다. 혼자여도 좋고 친구, 부부끼리여도 좋겠다. 중년이라면 머지않아 품을 벗어날 장성한 자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도 좋을 것이다. 오름의 억새를 헤치고 발끝에 닿는 파도를 건드려가며 하염없이 걷다 보면 서로 간에 못 전한 속내를 드러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석양 무렵 긴 그림자를 끌어 하루 여정을 접을 때쯤이면, 지친 만큼 두터워진 삶의 의미를 새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란 게 어차피 올레의 나그네길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 올레에서 사람이 죽었다. 호젓한 마을 길에서 혼자 걷던 여성이 무참히 살해됐다. 반응은 늘 그렇듯 급속하고 격했다. 도처에서 폭발하는 안전불감증 질타 목소리를 대통령도 "국가가 관심을 갖고 안전대책을 세우라"며 거들었다. 놀란 제주올레재단 측은 황급히 해당 코스를 폐쇄했다.
어마어마한 안전대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혼자 다니면 위험' 경고판서부터 길목마다 감시카메라(CCTV) 설치, 경찰관 순찰, 보안요원 배치, 비상전화 및 야간 보안등 설치 등에 이르기까지. 예전 서울 무악재 같은 고갯길은 도적과 맹수가 들끓어 다들 주막에서 일행을 모아서야 넘었다. 평화ㆍ치유ㆍ사색의 길 올레가 갑자기 그런 길이 돼버렸다. 올레 뿐인가. 지리산 둘레길, 대관령과 무등산 옛길 등이 덩달아 모두 섬뜩한 길이 됐다.
이건 아니다. 우리나라 한해 살인사건 발생건수는 1,200~1,300건이다. 강도ㆍ강간 같은 강력범죄까지 합하면 한해 2만4,000건에 달한다. 인구 10만 명당 살인은 2~3건, 강력범죄는 40~50건 꼴이다. 2007년 올레가 열린 이래 이곳을 거쳐간 올레꾼은 대충 따져도 300만 명에 육박한다. 이번 희생자는 올레에서 일어난 첫 강력사건 피해자다. 수치로 보면 여기보다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은 없다.
무엇보다 올레를 비롯해 전국에 산재한 자연탐방길은 찌든 일상을 벗어나 원초적 자연과 환경 속에서 오롯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삶의 숨통 같은 곳이다. 그게 처음 이 길을 착안한 취지이자, 사람들이 찾게 하는 존재가치다. 그런데 온갖 인공 설비들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모든 일상이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감시 받는 세상이 된 건 이미 오래됐다. 일찌기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 상시 감시의 원형감옥(팬옵티콘ㆍPanopticon)에 갇힌 사회다. 그 숨막히는 구조를 벗어나려 벼르고 별러 찾아 갔는데 그곳 도처에서 또 익숙한 감시카메라를 만나고, 보안요원과 마주친다면….
밝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운동 삼아 걸을만한 곳이라면 도시 집 주변 어디에든 있다. 급기야 올레 주변의 수목을 베어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는 더 배려심 깊은 주장에까지 이르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올레는 더 이상 올레가 아니다.
논점은 다른 게 아니다. 무슨 사안이 돌출할 때마다 우리사회의 반응이나 논의는 매번 불에 덴 듯 성급하고, 참을 수 없이 가볍다는 말이다. 그래서 본질이 지엽과 뒤엉켜 뭐가 더 중요한 요소인지 모호하게 되고, 끝내는 해법도 방향을 잃고 지리멸렬해진다. 우리사회에서 그 숱한 갈등과 대립이 여간해선 긍정적 변화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고 똑같은 패턴의 돌발적 발생과 소멸을 끝없이 반복하는 이유다. 올레 논의도 딱 그 범주에 있다.
그러므로 올레 문제는 서두르지 말고 찬찬히 보완책을 찾아보되, 본래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면 차라리 지금대로 놓아두는 편이 낫다. 그게 장기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왜 다들 매사 이토록 가볍고 급한지.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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