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40대 여성 살해사건의 범인이 마을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진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마을은 24일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설마 우리 동네 사람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마지막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어디 가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주 올레길 1코스의 시작 마을이라는 자부심도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실 올레길이 이 마을에 준 경제적 혜택이래야 손에 꼽을 정도다. 외지인을 빼면 겨우 구멍가게 2개가 올레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뿐이다. 이곳이 올레길의 시작점이다 보니 대부분 올레길 탐방객들은 1코스 종점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잠을 청한다. 그래도 이 마을 사람들은 지난 5년 간 올레길 일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보탤 정도로 자부심이 컸다. 항상 길가를 깨끗하게 쓸고 닦았고 홍보행사에도 꼬박꼬박 참가했다. 장난스런 올레꾼들이 감귤나무를 건드려도 모른 체했다. 그래서일까, 마을 주민들은 피해자 강씨가 숨진 데 대해 안타까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강씨의 시신이 유기된 곳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김모(47)씨는 "앞으로 끔찍해서 어떻게 일하러 가겠냐"면서 "마을 전체의 잘못인 것 같아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30년 동안 구멍가게를 운영한 홍옥순(82)씨는 "물이라도 사 가는 탐방객들이 있어 입에 풀칠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코스마저 폐쇄돼 버렸다"며 "다른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 역시 안전 불감증이 빚어낸 인재였다. 주민 강모(59)씨는 "일정을 단축하기 위해 새벽에 출발하거나, 야경을 보겠다며 밤늦게 올레길을 걷는 탐방객이 늘어 보안등이나 CCTV를 설치해 달라고 여러 차례 당국에 요청했지만 예산이 부족하다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아이들이 오늘 학교에 갔다가 친구들로부터 '살인자 동네 놈'이라는 놀림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며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올레꾼들의 편의 증진에 애썼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당국의 후진적 안전의식과 무대책 때문에 언제까지 힘없는 주민들만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인가, 새삼 올레길에서 든 생각이다.
서귀포=이동현 사회부기자 nan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