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찬, 김종길, 김남조 등 원로 시인부터 유안진, 신경림, 신달자, 안도현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38명의 시인들의 작품이 한 자리에 모인다. 이들의 시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육필 작품 100여편이 액자에 담겨 전시된다.
무대는 25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이즈에서 열리는'대한민국 대표시인 육필시 전'이다. 같은 기간 선보이는 '대한민국 작은 그림 미술제'의 특별전시이기도 하다.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육필시 전이 성사된 뒤에는 이일영(55) 한국미술센터 관장이 있다. 매년 열고 있는 '작은 그림 미술제'에 시인들의 육필시를 함께 전시하는 아이디어를 기획한 이가 이 관장이다. 그는 2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존의 시화전 개념이 아니라 시 자체를 독립된 작품으로 전시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40여명의 시인들을 한 번에 섭외하고, 이들의 작품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공간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육필시 전이 성사되기까지 무려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육필시 전을 "시 작품전"이라고 정의했다. 미술 작품만큼 보존성의 가치를 높였기 때문이다.
참여 시인들은 이 관장이 독일에서 공수한 보존용 특수용지에 각 2~3편씩 직접 시를 써 내려갔다. 최고령인 94세 황금찬 시인이 자신의 시 '별과 고기'를 용지에 또박또박 옮겼으며, 김종길 시인은 '고고', 유안진 시인은 '필요충분조건으로', 신달자 시인은 '불행'을 담았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도종환 시인의 '들국화'등도 전시된다.
보존 가치를 염두에 둔 이 관장은 특수용지를 수소문했다. 이 용지에 1,000자 원고지 모양을 인쇄해 특수 제작했다. "원고지 모양을 왜 고집했느냐"고 묻자 "문학이 있는 한 원고지도 존재한다.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용지는 시인들에게 10매씩 전달됐다. 2~3편씩 시를 쓰는데 필요한 배려였다.
이 관장은 "시인들은 대개 노트북 대신 만년필이나 연필을 이용해 손으로 시를 쓰기 때문에 필체가 매우 훌륭하다"며 "화가들처럼 밑그림 없이도 정확한 비율로 작품을 완성해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작품들이 모이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안도현 시인은 휴대전화를 아예 사용하지 않아 연락이 두절됐다가 어느 비가 오는 날 화랑을 직접 찾아 작품을 쓰고 갔어요. 신경림 선생도 일정 때문에 일본에 머무셨는데 마감 직전에 작품을 보내주셔서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이렇게 모인 시들은 4~10호 크기의 작은 그림 300여점과 함께 전시돼 갤러리 이즈의 4층 건물을 가득 채웠다.
이 관장은 미술계에선 변화를 즐기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인간문화재가 만든 부채에 화가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전시한 '부채바람전'을, 2005년엔 한국 대표 명시를 주제로 각 장르의 화가들이 역시 부채에 그림을 그려'부채에 담은 한국의 명시전' 등을 기획했다. 특이한 이력이 이런 아이디어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한 민간 경제연구소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8년간 일한 그는 미술사에 빠져 미술 전시기획자로 직업을 아예 바꿨다.
"예술과 대중을 소통하게 하는 창구를 만드는 게 제 역할입니다. 유명 시인들의 육필시 전도 같은 맥락입니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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