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마틴 셀리그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작년에 낸 책 <번성하라> 에서 어떤 동료 교수의 소년시절 추억담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소년이 무슨 일인가로 잔뜩 기분을 상하고 풀이 죽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면 엄마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얘야, 너 오늘 영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알지? 얼른 나가서 누구든 다른 사람을 좀 도와줘 보렴." 엄마의 그런 '기분전환법'을 들으며 자란 소년은 지금 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다. 남을 도우면 내가 낫는다는 것을 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치유법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학문적으로' 풀어보기 위해 그 교수는 엄마가 일러주곤 하던 그 치유법의 효과 유무를 엄밀한 과학적 실험에 붙여 검증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의 방식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 엄마의 소박한 지혜가 긍정심리학이라는 새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보여주자는 것이 이 일화의 골자다. 번성하라>
소박한 지혜는 평범해 보이지만 위대한 데가 있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해서 쌓은 지식도, 자랑할만한 최첨단 정보도 아니다. 인생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두루 지내온 사람들이 경험으로 알고 느낌으로 아는 직관적 진실, 그것이 지혜다. 이 지혜의 가장 값진 부분은 '인간의 진실에 대한 겸허한 이해'다. 위의 일화에 나오는 엄마는 사람들이 어느 때 힘을 얻고 행복해지는가를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는 그 경험에서 터득한 행복의 비결 하나를 아들에게 말해준 것이다. 엄마가 한 말은 "우리 아들 기분이 영 말이 아니구나. 어디 가서 맛좋은 것 사줄까?"도 아니고 "우리 구경갈까?"도 아니다. "나가서 누구든 다른 사람을 좀 도와주고 와 보렴"이다. 타인에게 베푸는 도움과 친절은, 그게 아무리 작은 도움이고 친절이라 할지라도 도와주는 사람 그 자신을 들어 올려 존재의 상승을 경험하게 한다. 사람을 마술처럼 바꿔놓는 것은 이런 존재상승의 경험이다. 위대한 엄마들은 그 경험의 비밀을 알고 있다.
남들보다 어쨌거나 더 많은 '스펙'을 쌓아야 하고 더 높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려 사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학생들이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가치인가를 아는 능력,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면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조석으로 성적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가치에 대한 감각도,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도 키울 겨를이 없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성적 압박에 시달리는 학생에게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거꾸러트리고 이겨야 하는 적수, 내 길을 가로막는 훼방자, 내게 올 기회를 가로채고자 모든 준비를 하고 있는 위험인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우정은 아무 가치도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 K는 이런 식으로 자라는 한국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아이들을 들볶는 엄마들에게, 전혀 새로운 기도법 하나를 가르치고 다닌다. "저애가 오늘 시험을 망치게 해주십시오"라고 천지신명에 빌 것이 아니라 "쟤가 오늘 시험에서 1등 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빌고 나면 "너는 마음이 편해져서 시험 부담도 없어지고 1등도 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이 기도법의 효과 유무를 과학적 실험에 붙여보아야 할까? 그럴 필요 없다. 성적에 관한 효험 여부를 떠나, 성적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어떤 것을 K의 기도법은 담고 있다. 그것은 '가치'에 대한 감각 길러주기의 효과다. 우정이라는 가치를 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네가 흥하고 싶으면 남부터 흥하게 하라"고 말한 것은 공자다. 인문학의 이 선각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바로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이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런 감각 키우기의 기회를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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