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변두리에 살던 어린 시절의 어느 복날, 동네 우물가에서 어른들이 개 잡는 장면을 어쩌다 보았다. 높은 곳에 목줄이 걸린 채 공중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개를 몽둥이로 마구 내려치는 광경은 어린 눈에도 너무 참혹했다. 잠깐 보고 울음이 터졌는데, 다행히 목줄이 풀려 개는 도망쳤다.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멍청한 개는 다시 주인을 찾아 돌아왔고, 그 멍청한 개의 모진 주인은 다시 그 개를 때려죽인 뒤 이웃과 함께 나눠먹었다. 그 뒤로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 전에도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평생 개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산 것이다.
복날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복(伏)은 사람(人) 옆에 개(犬)가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굴복한다, 복종한다는 뜻을 표현한 것인데, 무더위를 복(伏)이라 한 것은 '음기가 양기에 굴복한다'는 뜻이라고 하나, 아주 추운 날을 '한(寒)'이라 한 것에 비추어 보면, 꼭 맞는 말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더위에 굴복하여 쉬는 날'이라는 뜻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24절기에 해당하지 않는 삼복(三伏)을 '특별한 날'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진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진덕공(秦德公) 2년(BC 679)에 개를 잡아 성의 4대문에 달아매어 충재(蟲災)를 예방했다고 하는데 물론 이것과 개고기를 먹는 풍습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복(伏)자에서 개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영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보다는 농경 사회에서 개가 별 쓸모는 없으나 쉽게 기를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렵(狩獵)과 유목을 주로 하던 사람들에게 개는 사람보다 더 소중한 '친구'이자 '조수'였다. 그런 문화권에서 개는 사람보다 유능한 양치기이자 사냥꾼이었으며, 주인이 자는 동안에도 위험을 감지해 알려주는 '보호자'였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개는 외지인의 접근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별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일은 개보다 까치가 먼저 알려줬다. 시어머니에게 야단맞은 며느리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심리적' 용도 외에 개의 실용적 용도는 거의 없었다. 다만 도시에서는 '똥'을 처리하는 데에 추가적인 '쓸모'가 있었다. 그래서 '똥개'라는 말이 생겼다. 우리말 이름 앞에 '똥'자가 들어가 어울리는 동물은 개, 돼지, 파리밖에 없다. 이들은 모두 똥을 먹는다는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개의 주된 용도는 '식용'(食用)이었다. 그런데 개고기는 천한 음식으로 취급되었다. 생전에 아무리 개고기를 좋아했던 사람의 제사라도, 또 제삿날이 하필 복날이라도, 제사상에 개고기를 올리는 법은 없다. 연산군 때에는 진상하는 육포(肉脯)에 천한 개고기를 섞어 보낸 지방관을 엄벌하기도 했다. 개를 천하게 여긴 것은 흔했던 데다가 '똥 먹는 짐승'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견문기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집집마다 한두 마리씩의 개를 길렀다고 한다. 당시 서울 장안에 5만호 정도의 집이 있었으니, 5만~10만 마리의 개가 있었던 셈이다. 이 개들이 복날의 단백질 보충용으로 사용되었다.
'육개장'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개를 천하게 여긴 서울 양반들이 '개장'에 쇠고기 대신 개고기를 넣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양반 중에도 개고기를 즐긴 사람은 많았지만, '특권 신분의 표지'를 달고 싶은 욕망은 식성도 바꾸기 마련이다.
'똥 먹는 개'와 비슷한 존재가 '뇌물 먹는 더러운 관리'라는 뜻의 '오리'(汚吏)였다. 조선시대 탐관오리는 형식적인 팽형(烹刑)에 처했다고 하는데, 영조는 이들을 일러 "백성들이 그 삶은 고기와 뼈를 보고 싶어 하는 자"라고 극언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말에서 '개같이 번다'는 말은 '똥도 먹는다'는 뜻이다. 개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겠는가? 돈에도 귀천이 있다. 더러운 '뇌물'이나 '불법자금'을 챙겨 돈을 모은 사람들은, 아무리 부자라도 '천한 것'들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부자 된 사람들이 '존경 받는 시대'는 오지 않는 편이 낫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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