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민 씨 조정의 요청으로 군란에 가담했던 주동자를 모조리 체포하라는 군령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청군은 먼저 정찰대를 앞세우고 동묘에서 출발하여 청계천의 영도교를 건너 왕십리 벌에 이르렀다. 정찰대는 한식경 전쯤에 미리 도착하였는데 조선 측 역관과 별감 서너 명이 그들을 안내했다. 자시가 가까울 무렵이면 동네 사람들이 이미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을 시각이었다. 정찰대의 군관이 마건충에게 보고하기를 사방이 배추밭이라 마을을 포위하면 빠져나갈 곳은 너른 들판뿐이라고 하였다. 마건충은 병력을 삼 대로 나누어 마을의 좌우 측과 배후를 둘러싸고 중군이 마을 안으로 진격한다는 영을 내렸다. 병력 배치가 끝나자 군대는 총검을 치켜들고 마을 안으로 쳐들어갔고 우선 중앙에 동계 사랑이 있는 마당을 점령하고 십여 명씩 패를 나누어 집집마다 수색을 벌였다. 그들은 집 안에 들어가서 사내가 보이면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끌어내어 동계 사랑 앞으로 몰아왔다. 그들은 곤히 자다가 난데없는 청군의 급습에 혼비백산하여 담을 넘어 달아나다가 미리 포위하고 있던 군사들에게 잡혀 죽거나 총탄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어느 집에서는 미리 낌새를 알아차린 조선 군병들이 서로 연락하여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두 맨손이거나 농기구뿐이었다. 퇴청 시에 어느 누구도 무기를 지니고 관문을 나설 수 없고 더구나 도성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저항하는 자는 즉시 총이나 칼로 진압되었다. 마당에는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고 마건충은 수하 장교들과 더불어 마당으로 끌려오는 마을 남자들을 내다보았다. 몇 차례나 집집을 훑고 돌아온 군사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늘어서자 마의 부장이 앞에 나와 연설을 했고 역관이 조선어로 통역했다.
우리는 조선 국왕의 요청으로 이번에 군란을 일으킨 주동자를 색출하려고 한다. 양민은 보호받을 것이며 죄 없는 자는 심사가 끝난 다음에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만약 심사 도중에 소란을 일으키거나 반항하면 즉시 처결한다. 주동자 이외에도 군인인 자는 스스로 소속과 직책을 말하면 죄의 경중에 따라 너그럽게 조치할 것이다.
청군의 부장이 물러서자 이번에는 무예별감이 나와 조선말로 외쳤다.
이제부터 우리가 찾고 있는 자들의 이름을 부르겠다. 호명된 자는 이쪽으로 나와 대기하기 바란다. 스스로 숨기려 하거나 옆에서 숨겨주려 한다면 가족들까지 처벌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그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거사 전에 그들이 돌렸던 통문에 적힌 순서 그대로였다. 별장 김장석의 이름을 부르자 쭈그리고 앉았던 사내들 틈에서 그가 걸어나와 마당 한쪽에 섰고 군사들이 그의 어깨를 개머리판으로 쳐서 꿇어 앉혔다. 김만복의 이름을 불렀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별감은 종이에서 얼굴을 들고 몇 번 더 부르면서 둘러보다가 군사들에게 한 사람을 지목하며 말했다.
저놈을 끌고 가서 김만복이네 가족을 끌고 오라.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군율에 따라 처치하라.
군사들이 지목 받은 자를 데리고 마당 밖으로 사라졌다. 별장 유춘길, 유영길 형제의 이름을 부르자 유춘길이 다리를 절며 걸어나왔다. 그는 이미 선혜청 소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포도청에 끌려가 국문을 받았던 터였고 난군의 파옥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유영길은 요행히 피했는지 잡히지 않았다. 연이어 통문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은 순순히 걸어나와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십여 명의 이름 부르기가 끝나자 청군은 그들을 결박하여 마을 밖으로 압송했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심사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나이와 신체로 어림짐작하여 군인으로 보이는 사내들을 다시 가려냈고 군인으로서 요패(腰牌)를 차고 있던 자는 스스로 자복하지 않았다 하여 뭇매를 때리고는 포박했다. 마당의 바깥쪽에서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동정만 살피던 가족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은 허공으로 몇 발 위협사격을 해보였고 겁에 질린 가족들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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