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금호타이어의 신제품(에코윙S) 발표회가 마련된 인천 항공기 격납고. 타이어성능을 보여주는 여러 퍼포먼스가 끝나고 본격적인 제품설명이 시작됐다. 단상에 오른 사람은 뜻밖에도 박세창(36) 부사장.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의 아들이다. 짙은 정장차림에 이어마이크를 끼고 등단한 그는 400여명의 참석자 앞에서 시종 자연스런 표정으로 원고도 없이 제품의 특징을 하나씩 조목조목 설명했다.
박 부사장은 '깜짝 프레젠텐이션(PT)'을 위해 여러 차례 리허설까지 갖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다는 후문이다. 이날은 그룹 후계자인 박 부사장이 대외행사에 공식 데뷔하는 날이기도 했다.
지난 17일 제주 KAL호텔. 한진그룹 계열 저가항공사인 진에어 취항 4주년 행사가 열렸다. PT를 맡은 건 조양호 그룹 회장의 막내딸인 조현민(29) 대한항공 상무였다. PT의 마술사로 불리는 스티브 잡스의 드레스코드(청바지에 검정상의)에 참고 받은 듯, 청바지에 검정 재킷으로 등장한 그는 무선마이크를 꽂은 채 경영실적과 향후 계획을 설명해갔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 상무는 정부기관과 기업 등에서 이미 여러 차례 강의를 했고 이번엔 전경련 하계포럼(25~28일) 강연까지 맡게 됐다"고 말했다.
재계 창업세대나 연배 많은 2세들은 좀처럼 외부노출을 꺼려왔다. 경영설명회, 신제품발표회, 기자간담회에 직접 참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 하더라도 인사말 정도였고, 자세한 PT는 실무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젊은 3세들은 확연히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 무대 등단을 오히려 즐기면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유창하게 PT를 주도하고 있다.
'오너3세 PT시대'의 막을 연 건 정의선(42) 현대차 부회장이다. 2006년 파리모터쇼 디자인 경영선언 이래, 해외 유명모터쇼마다 신차발표 PT는 거의 예외 없이 그의 몫이었다. 지난해 초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선 직접 무대에 올라'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라는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 선언연설을 하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이제 PT나 경영연설에 관한 한 달인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봐도 된다"고 평했다.
정용진(44) 신세계 부회장은 지난해 5월 이마트 법인 출범식에서 청바지와 캐주얼 재킷 차림으로 나와 이마트의 미래비전에 대해 직접 PT를 진행했다.
삼성가에선 PT는 아니지만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올 초 주주총회 사회를 처음 맡았는데, 공개무대에 첫 데뷔치고는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관계자는 "오너 입장에서보면 수많은 소액주주까지 참석하는 주총은 PT보다 사실상 리스크가 더 크고 부담스런 자리"라고 말했다.
오너 3세들의 PT가 주는 효과는 무엇보다 '준비된 후계자'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 무대 위에서 자연스런 제스처, 열정적인 설명, 유창한 언변, 소통하는 자세 등을 보여줌으로써, '그저 아버지 잘 만나 물려받게 된 후계자'가 아닌 '능력과 자질을 갖춘 리더'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부분 미국유학파인 3세들은 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 같은 미국 IT기업 창업자들이 현란한 PT를 직접 주도하고 이를 통해 '스타 오너ㆍCEO'가 되고 기업가치제고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서, PT의 위력을 실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3세들은 많은 점에서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데 PT는 그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경영스타일에도 향후 큰 변화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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