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의 한 교수 연구실. 독특한 스타일의 웬 '청년'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던지며 들어섰다. '똥 싼 바지'라고 부르는 배기팬츠 풍의 7부 반바지와 반팔, 록 스타에게나 어울릴 메탈반지와 목걸이에서 묘한 '간지'가 묻어났다. '날티' 나는 그 주인공이 세계 4대 디자인 대회에서 40여 차례나 수상한 배상민(40) 교수다.
이달 16일 발표된 '2012 IDEA 어워드'에서도 배 교수는 두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 공작기계 디자인과 사운드스프레이가 상업 및 산업제품 디자인 부분과 사회적 영향 부문에서 각각 수상했다. 사운드스프레이는 자가발전기가 내장된 스프레이 통을 흔들면 모기 퇴치 초음파가 나오는 제품. 살충제를 쓰지 않아 친환경적이고, 흔들면 충전돼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제3세계에 안성맞춤이다. 배 교수는 "'디자인은 나눔'이라는 철학이 잘 녹아 든 상품"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공헌 디자인을 계속 하고 싶다"고 했다.
2005년부터 월드비전, GS칼텍스와 함께 진행하는 '나눔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 MP3 플레이어 '크로스 큐브'와 친환경 아로마 가습기 '러브팟' 등 지금까지 이 프로젝트로 출시한 상품 4개를 팔아 얻은 수익 15억원 전액을 어린이 교육과 장학사업에 기부했다.
"사회적 기부를 아무리 외쳐도 사회문화는 잘 바뀌지 않아요. 반면 디자인은 사람들이 매력적인 '착한 상품'을 소비하도록 할 수 있어요. 그게 디자인의 힘이죠."
100여일 후엔 에티오피아로 떠난다. 마사이 족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서다. 이들은 윗부분이 평평한 찐빵 모양의 집에서 산다. 흙으로 짓는데 반년 걸리고, 문이 하나라 통풍도 안 된다. 집이 무너져 내려 목숨을 잃는 이도 많다. 지난해엔 사전조사도 다녀왔다. 그때 선교단체에서 지어준, 슬레이트 지붕 달린 벽돌집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 묻자 한 원주민이 이렇게 답했단다. "집이 못 생겼다."
충격이었다. 배 교수 역시 집 하면 떠오르는, 지붕 달린 집을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문화적 충격은 더했다.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준다고 하면서 내 기준으로만 생각 했구나 반성도 여러 번 했다. 그 고민 끝에 나온 게 흙벽돌집이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 나무, 흰 개미집 흙을 구워 흙벽돌을 만들고, 그것을 레고처럼 끼워 맞춰 전통 집과 똑같이 만들기로 했다. 배 교수는 "흰개미는 침으로 흙을 뭉쳐 집을 만들어요. 개미집 흙이 풀처럼 작용해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자신했다. 여기에 빗물을 식수로 정화하는 장치와 환기를 해주는 열 교환 장치도 티 나지 않게 구현할 생각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다.
배 교수는 본인의 옷도 직접 디자인한다. "내가 디자이너인데, 다른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고 다니며 광고해 줄 필요 있냐"는 이유에서다. 괴짜 교수답게 어릴 적 꿈 역시 괴짜 발명왕 에디슨 같은 발명가였다. 가전제품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걸 워낙 좋아했다. 그 덕에 초등학생이던 1983년 제1회 전국과학상자조립경진대회에 나가 1등 했다. 실험을 하다 집 2,3층을 홀딱 태워먹은 적도 있다.
그러다 고교시절에는 우아한 발레리노에 매료됐다. 아무 말 않고 몸짓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발레가 그렇게 멋질 수 없었다. 하지만 무용학과가 아닌,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아버지와 선교사인 어머니는 발레를 전공하겠다는 아들의 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도피 반, 재미 반으로 시작한 사진에 빠져 미국 파슨즈 디자인스쿨 유학길에 올랐다.
산업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꾼 뒤 그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1997년 세계 최고 수준의 파슨즈 디자인스쿨 교수가 됐다. 당시 배 교수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었다. 그곳에서 교수로 있은 지 8년째 되던 2005년 배 교수는 돌연 사표를 내고, '디자인의 불모지' 카이스트로 왔다.
"문제를 해결할 혁신적인 방안을 찾는 게 디자인의 정의에요. 10대 90의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어디에 더 많을까요? 가난한 90% 사람들 쪽일 텐데 디자이너 대다수는 구매력 있는 나머지 10%를 위해 디자인 합니다. 뉴욕에 있을 때 저부터가 그랬고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긴 싫었어요."
배 교수는 "카이스트로 자리 옮기는 것을 귀양살이"라고 여겼다. 기중기, 수원 화성을 디자인한 다산 정약용이 귀양 중에 많은 업적을 남겼듯 자신도 이전부터 꿈꿨던 사회공헌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좌뇌와 우뇌의 융합이란 새로운 도전이 설??幷? "카이스트는 디자이너 연구원이 모인 곳이에요. 이성을 담당하는 좌뇌죠. 전 감성적인 우뇌에요. 둘을 잘 섞으면 엄청난 시너지가 날 거라 여긴 겁니다. 남들은 말렸지만.(웃음)"
귀양살이 기간 업적은 놀라웠다. 2005년 9월 카이스트에 부임한 이후 레드닷ㆍiFㆍIDEAㆍ굿 디자인 어워드 등 세계 4대 디자인 대회에서 받은 상만 41개. 한 해 동안 4개 대회에서 모두 수상하는 '그랜드 슬램'도 두 차례나 이뤘다. 감성적인 디자인에 과학기술을 녹여낸 덕이다. 가령 2007년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대상을 탄 롤리-폴리 화분은 오뚝이 원리를 이용했다. 화분 속 수분이 줄면 무게의 균형이 흐트러져 기우는데, 이를 보고 물을 줘야 할 때를 알 수 있게 했다. 사운드스프레이나 흙벽돌집에 적정한 기술을 적용한 것도 일례다.
인터뷰 내내 그는 나눔을 강조했다.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필요를 충족해 주는 디자이너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대전=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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