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후보자 4명에 대한 임명동의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간 샅바싸움이 어지간해선 끝나지 않을 조짐이다. 이러다 대법관 공석 사태가 장기화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헌법재판관 공백 상황이 훌쩍 1년을 넘겼으니 그런 일이 사법부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피해야 한다. 하지만 야당의 김병화 대법관 후보자 불가 입장이 완강하다. 김 후보자가 낙마한다면, 대법원에게는 그것 역시 대법관 집단 공백 못지 않은 최악의 사태다. 사법사상 대법관 후보자가 국회에서 거부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위기감에 휩싸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대법원 책임이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로부터 13명의 대법관 후보자를 추천 받아 대법원장이 그 중 4명을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4일. 대법관 4명의 퇴임 날짜와 인사청문회 준비 때문에 신속히 결정한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시간 부족 때문에 쫓기듯 후보자를 골랐고 검증다운 검증은 못했다는 이야기다. 후보자 추천 전에 대강이나마 임명 제청 대상자가 정해져서 강도 높은 검증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과거 대법관 후보자의 낙마 가능성이 이번처럼 심각하게 거론되는 상황이 없었다는 점도 검증 소홀의 원인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위장 전입에 다운계약서 작성, 세금 탈루에 수사 무마 의혹까지 있거나 종교 편향이 매우 의심되는 이를 대법관 후보자로 선택해 파행적 상황을 일으킨 근본 배경과 원인은 따로 있다.
대법원은 대법관 후보자 제청은 물론 법관 인사 때마다 개인의 경륜과 자질, 조직과 판결의 안정성을 중시했다고 설명한다. 적어도 고위직에 오르거나 오를 정도의 법관이라면 경륜과 자질은 이미 검증된 것이다. 개인 간 격차가 있다 해도 미미한 수준이다. 인사 기준 중 조직과 판결의 안정성에 가중치가 더 실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사법시험 기수 등을 따지는 조직 안정성은 그렇다 쳐도 판결의 안정성은 무얼 말할까.
대체로 무리한 법 해석에 터잡거나 대법원 판례에 어긋나는 '튀는 판결'로 사법부 안팎에 혼선과 혼란을 초래하지 않는 것을 판결의 안정성이라고 한다. 법의 해석과 적용 기능을 하는 조직 특성상 사법부는 기본적으로 안정 지향적으로 보수적 가치를 추구한다. 때문에 판결의 안정성은 일반적으로 보수적 색채가 두드러지는 판결에 의해 달성된다. 여기에 대법원장이 절대적 권한을 갖는 사법부의 관료주의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보수 성향 인사가 사법부 수장이 되면 전향적으로 진보적 가치를 중시하는 판결이 나오기 힘들어 진다.
청와대 발표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장은 '안정성과 개혁성' 때문에 임명됐다. 그는 사법부 내에서도 보수 성향이 뚜렷한 법관이다. 그런 그가 역시 보수 성향의 법관과 검찰 간부를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 제청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대법관 14명 중 진보 성향 대법관을 단 한 명도 두지 않으려는 시도는 개혁성은 묻어둔 채 안정성만 내세운 보수의 과잉이다. 그로 인해 진보적 가치는 질식할 위기에 처했다. 검증 시간이 부족한 현실은 보수 성향 인사들로 대법관을 채우는 데 호재로 작용했을 것이다. 대법원에서 진보의 흔적을 지우고 서둘러 보수의 색깔을 입히려던 욕심, 판결의 안정성을 명분 삼아 대법원과 사법부의 보수화를 고착시키려던 욕심,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바라는 상당수 국민들의 기대를 외면한 불통…. 그런 것들이 초유의 대법관 공석 위기 사태를 불러온 근본 원인이라 해도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이다. "헌법기관은 그 구성만으로도 헌법적 가치와 원칙이 구현돼야 한다"며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외면한 대법원을 비판한 전수안 전 대법관의 퇴임사가 남긴 울림이 큰 것만 보아도 그렇다. 대법관 후보자 중 누군가가 낙마한다면, 단 한 명도 좋으니 대법원장은 진보 성향의 인사를 발탁하기 바란다. 그것이 보수와 판결의 안정성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다.
황상진 부국장 겸 디지털뉴스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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