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묶고 있었던 압박붕대를 풀었다. 임신 사실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여기는 프랑스 파리다. 열 몇 시간의 장시간 비행 중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떠난다는 설렘이나 시공간의 이동이 주는 어떤 경이로움 같은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배속에 아기가 돌덩어리처럼 무거워 질수록 현실의 무게도 점점 무거워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였다. 몇 년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반복하던 사랑 끝에 얻은 소중한 아이였다. 첫사랑 이었다. 처음 씨앗 이었을 때 희망을 잉태한 막달라 마리아처럼 용감했다. 사랑 앞에 장사 있으면 나를 돌로 치시라는 듯, 아이를 가졌다. 처녀가 임신을 했다. 집에서 나왔다. 여기저기 거처를 옮기고 또 때론 길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거리는 사막이었다. 사랑은 조형물이 될 수 없었다. 아름다웠지만 설치할 공간이 없었다. 농노를 따라 만들어진 곡식 창고나 수로처럼 자연스럽지 못했고, 전기송전탑처럼 쓸모 있지도 못했다. 허수아비처럼 소박하지도 않았고 그냥 학교 옆에 생겨난 러브호텔같이 뜬금없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안에서는 어디를 다녀 봐도 헛수고란 사실만을 느꼈다. 그러나 사랑의 확신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은 없었다. 어쩌면 출산을 통해 그 결실을 확인 하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사랑은 불륜이었으므로 나는 어떤 형태를 취할 수도 취 할 능력도 없었다. 딴살림을 차린다는 형식 자체를 맘에 두지 않고 그 방식을 마음 밑바닥에서 끝없이 밀어냈다. 그냥 사랑이라는 형태여야만 했다.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늦가을 첫 눈을 맞은 걸로 시작된 사랑 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냉대였다. 여물지도 못하고 썩어버린 사과였다. 나는 그 사과를 배속에 넣어 키웠고 이제야 겨우 붕대를 푸는 것이다. 사과가 자라기에 내 배는 너무 작았다. 그래서 나는 파리를 찾았다. 민박집은 파리에서 사는 친구가 예약했다. 친구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성경책을 꺼내놓고 기도를 했다. 여기는 천국이라는 말을 하며 연신 희망섞인 미소를 날렸다. 그러다가 배를 유심히 보던 친구는 내가 임신 9개월이란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 뒤처리가 부담이 되었을 것이었기에. 오히려 친구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장 연설을 해야 했다. 아이 아빠가 곧 올 거라고, 돈도 넉넉하니 염려 말라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갈비뼈를 만져 보게 하는 예수의 아픈 팔목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 나는 내가 부여잡고 있는 것이 사랑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오지 않는 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럴 수도 있을까. 주민등록증을 수시로 제시해야하는 관공서의 방문객처럼 믿음은 어느새 뻣뻣해졌고 나는 그 사랑을 어느새 볼모로 세우고 있었다. 그런 친구의 의심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는 파리, 한국이 아니니까. 내 사정을 검열당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가 바로 아이를 낳을 장소다. 아무도 내 새 생명에 불순물 섞인 시선을 들이밀지 않는 이역만리 타지다.
밖으로 나갔다. 불편한 시선없이 거리를 걷는 자유로움으로 마음껏 임신한 여자가 됐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배가 불러온다.
버스를 탔다. 버스는 작은 파리를 삼십 분 만에 종착역으로 나를 안내했다. 다시 같은 버스로 시내 한 복판에 내린 곳은 광장이다. 대로사이, 시야가 확 트인 중간 쯤에 그 유명한 에펠의 탑이 있었고 그 위로 가을빛의 회색구름이 몇 점 떠있는 청량한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배가 불러 차올라 와서 숨이 막혔다. 순간 갑자기 큰 풍선이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늘로 둥둥 떠올랐다. 한국에서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날 붙들어 맺던 나와 타인의 고정된 시선이 없었을 뿐. 웃음이 났다. 내가 꿈꾸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자유였다. 모든 것이 그 존재 자체로 존중되는 자유. 막달라 마리아가 꿈꾸던 자유. 어느 순간 내 옆에 블라디미리와 에스트라공이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을 보고소리내어 외친다. 저기 고도가 날아간다.
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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