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
(김사인 '장마' 부분 <가만히 좋아하는> ) 가만히>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긴 긴 장마"로 시는 닫히지만, 그렇게 닫힌 시의 문 앞에서 뭉그대게 만드는, 미련 같은 여운이 저 시에는 있다.
쫓기듯 해야 할 일도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그리 귀한 적 없었던 시간이니 지금처럼 빈 방에 누워 이리저리 디굴거린들 아깝거나 아쉬울 것도 없는 그런 때. 그리고 종일 비가 온다. 어제도 그제도, 어쩌면 내일도.
지금 '나'는 팔자 좋은 옛 사람들이 즐겼다는 '와유(臥遊)'라는 걸 하는 중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산천 유람 못 떠난 선비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상상으로 유람하기. 그는 추억이나 상상의 그림 속을 떠도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네이버 신어 사전에도 등재된 '방콕(방에 콕 틀어박혀 나오지 않음)'을 하는 거다. 이 시에서 게으름의 미학이나 적극적 태만의 미덕을 찾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ㄹ까'의 종결어미로 저리 반복해서 제 의사를 묻는 것, 그리고 충동적 기운이 한 데 모였다가 부지불식중에 툭 불거져 나온 듯한 저 욕 '네기럴'은 뭘까? 어쩌면 그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동경에 몸달아 있는지 모른다. 게으름에 흔연히 투신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 조급해하고 있는 거다. 공양간 누룽지나 아랫목의 온기, 들창 너머로 보이는 먼 산의 풍경 속을 와유하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게 뭘까. 무엇이 부러운 한량의 한없이 느린 시간을 뒤흔들어, 저 묘한 여운의 시를 짓게 하고, 또 읽는 이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곁을 서성거리게 하는 걸까. <피로 사회> 라는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 성취에 몸 단 이 '피로(疲勞) 사회'의 성과주체들이 이미 쉬는 방법, 무위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일까? 그래서 저리 마음을 가만히 놓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것일까? 혹시, 저 꼼지락거림의 이면에 어떤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긋지긋한 비의 주렴을 뚫고 발 젖는 수고를 감내하고라도 도달하고 싶은. 시인의 고향 근처에 실재하는 절(수타사)이 아닌, 관념 속 동경의 공간. 피로>
시에서처럼, 어제도 그제도 지금도 비는 '구죽죽' 내리고 있고, 하여 저 시에 마음 빼앗긴 이의 어떤 공간에 대한 갈증이 저 시의 그리움 위에 가만히 포개지는 것이다. 빗물이 주렴처럼 가지런하게 펼쳐지는 함석 처마 밑, 조망의 시야는 충분히 열려 있지만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숨길 만큼은 적당히 닫혀 있고, 낡은 소파라도 하나쯤 놓여있다면 멍하니 앉아 책장이라도 넘기다가 또 지루해지면 가만히 누워봐도 좋을 그런 자리. 아늑한 은신과 조망의 자리.
토목학자인 나카무라 요시오(中村良夫)는 <풍경학 입문> 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애플턴이라는 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시야를 확보하면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지키려는 이 조망과 은신의 욕망이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내재된 원형적 생존욕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손도끼 사냥꾼으로서 먹잇감과 포식자를 상대하던 태초의 인간이 지녔을 생존의 절박한 몸가짐이 긴 진화의 시간에도 아주 사라지지는 않아, 우리의 본능적 취향과 집단의식 속에, 일상의 공간 속에 기억의 화석처럼 남아 있다는 의미다. 풍경학>
은신의 상징적 공간으로는 동굴이나 지하실, 다락방, 골방 등을 들 수 있다. 대표적 조망 공간에는 산마루나 빌딩의 스카이라운지, 호숫가 전망대 등이 있을 것이다. 전자가 대부분 어둡고 구석진 자리라면 후자는 활짝 열린 밝고 투명한 장소들이다. 애플턴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인간의 본능이 갈망하는 공간은 저 두 극단의 욕망을 적절하게 조화할 수 있는 어떤 곳이지 않을까. 처마를 이고 앉은 그늘 깊은 자리 같은 곳.
저 시의 화자가 종일 먼 산을 바라보려던 들창 위에도 비를 가리고 갠 하늘의 햇빛을 막아줄, 그래서 비 맞을 일도 없고 깊은 그늘 속에 숨을 수도 있게 해주는 넉넉한 처마가 얹혀 있었을 것이다. 유리로 외벽을 마감한 주거 빌딩이나 수사기관의 취조실처럼, 바깥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기능화한 창이나 벽이 있지만, 처마가 만들어내는 은신과 조망의 공간을 대신하기는 힘들 다. 바람도 향기도 소리도 차단된 공간 안에서의 은신과 조망은, 우리가 3D영화를 통해 체험하는 가상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처마는 설치 기법이나 형태, 얹힌 위치나 기능 등에 따라 다양한 전문적인 이름들로 세분된다. 지붕에서 곧장 이어 늘인 형태가 대부분이지만, 마당 한 켠이나 툇마루 위를 살짝 가릴 목적으로 지붕과 별도로 얹은 것도 있고, 창문 위만 가린 처마도 있다. 하지만 모두 빗물로부터 창이나 외벽을 보호하고 햇빛을 가려주는 기능적 장치라는 점에서는 같다. 처마는 해가 낮게 떴다 금세 지는 겨울 햇살을 넉넉히 받아들여 그 열기를 바깥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주는 기능도 한다. 은신과 조망의 기능은 그러니까, 백과사전이 설명하지 못한 처마의 숨은 기능, 건축학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인간학적 기능인 셈이다.
가령, 서울 중구 명동 한복판의 한 오래된 커피숍 옥상 테라스에서 마주친 저 아담한 처마는 신식 커피숍들이 데크 위에 펼쳐둔 기계식 차양은 결코 줄 수 없는 은일(隱逸)의 휴식, <풍경학 입문> 의 필자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자면 '관능적 안식'을 선사한다. 단위 면적당 부동산 비용이 국내 최고라는 금싸라기 공간에 소박하나마 뜰이 있고, 적어도 10년은 됐을 담쟁이 넝쿨도 시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 뜰의 담장과 처마의 끝선으로 트리밍된 도심 빌딩의 풍경이 깊은 산사 요사채의 풍경 같지는 않지만 그만하면 며칠 숨어 살아보고 싶은, 아니 하룻밤 한나절만이라도 그 품에 안겨 저 번다한 도심의 쓸쓸한 풍경을 조망하고 싶은 욕망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안겨보고 싶을 만큼 관능적인. 풍경학>
낮과 밤의 인구밀도 차이로 산정되는 도심 공동화율로 따지더라도 명동은 강남의 몇몇 유흥ㆍ소비 공간이나 강북의 홍익대 주변과도 극명하게 다르다. 명동의 중심 공간은 밤이 이슥해지면 인적이 끊긴다. 쇼윈도 불빛과 조명들이 꺼지면, 저 오래된 골목들은 한낮의 소음과 보행체증이 신기루이기나 했던 듯 순식간에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공간으로 변한다. 그 대비는 높은 빌딩에서 명동의 건물들을 조감할 때 펼쳐지는 쇠락의 안쓰러운 풍경처럼, 너무 극적이어서 낯설다. 종이컵이나 비닐 봉지 찢긴 쇼핑백 따위들이 상가들이 내놓은 하루치의 쓰레기 더미들과 함께 나뒹굴 때 명동의 오래된 골목들은 화장 지운 피로한 얼굴로, 새벽 청소차가 올 때까지 단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거기에 사람이, 체온이 깃들일 자리는 없다. 요컨대 명동은 보여주는 공간, 잠깐씩 스쳐가도록 진화한 공간이다.
거기서 경험하는 머묾의 충동은, 그러니까 저 오래된 처마의 유혹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긴 긴 장마'에 갇힌들, 아니 어쩌면 비의 주렴이 있어 저 처마 아래 공간은 더 탐스러워 보이는지 모른다. 시인이 '네기럴'하면서 입 다시던 공간이 어쩌면 저와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
봄날의 좋은 볕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
김사인의 시 '빈 방'의 처마는, 오래 전 떠나온(간) 그리운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시인은 거처 없이 떠도는 저 '순한 이마'들을 처마 밑 자리로 모은다. 안으로 닫혀 있어 박한 공간이지만, 그래도 이 비는 가려줄 듯해설까. 저 처마는 분명 옹색한 가난의 거처지만, 기댈 데 없는 가난이 깃들일 수 있는 마지막 은신의 거처이기도 한 모양이다. 지금 시인은 저문 밤 빈 방에서 저 싸한 추억에 젖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그리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눕는다. 그의 머리맡 창문 위에도 자그마한 처마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