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2030 세상보기] '소통'과 '상식'에 대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2030 세상보기] '소통'과 '상식'에 대해

입력
2012.07.18 12:03
0 0

이 정부 들어 '소통'이란 말이 유난히 자주 쓰였다. 그만큼 사람들이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그것을 기대한단 뜻일 게다. 그런데 이 말이 사용되는 용법도 참으로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막연하게 '던져지는 모든 질문에 답변하는 것'을 소통의 자세로 여긴다. 그런 시각에선 어떤 트위터리안이 맞팔을 안해주는 것도 그가 '불통'임을 증명하는 표지가 된다.

그러나 조금만 상상해 봐도 모든 질문에 답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질문하는 사람이 몇 없단 이유로 그 '상상'을 거부하고 질문에 답하지 않는 이를 권위적이라 규탄한다. 사실 한정된 공간의 토론도 계속 질문을 퍼부어대는 이가 있다면 진행이 불가능하니, 정치토론처럼 '열려 있는' 상황에서는 저런 얘기가 무의미하다.

따라서 '소통'이란 말이 의미를 지니려면 양적인 평가를 넘어서야 한다. 적정 수준 이상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 모든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그저 심심풀이 땅콩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쓰는 이라도 보통 한 두 개의 질문에는 답변을 한다. 안 그러면 심심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들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들 중 무언가를 선별하고 거기에 대꾸를 하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누구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어떤 질문에 대답하느냐다.

세상엔 친구들과만 대화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특정 문제에 대해선 친구가 아닌 이와도 기꺼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 세상엔 자신을 가장 극적으로 오해한 시시껄렁한 질문에 대꾸하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견해에 대한 가장 정교한 반대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에게 '소통'을 말할 때 주로 요구하는 것은 후자들이다.

그렇다면 '소통'을 말하기 위해선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저 사람과 얼마나 가까운 입장인지, 내가 던지는 질문이 저 사람이 이미 너무 많이 들었고 대략 답변한 내용인건 아닌지, 과연 내 질문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민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 대화에서 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등등. 무턱대고 던져놓고 '손님은 왕'이니까 니가 답변을 해보라는 태도로는 생활세계에서도 버림을 받는다. 그러니 생활세계에서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정치토론이나 담론의 세계에서 보충 받으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소통'에 대한 또 하나의 극단적인 견해는 그것을 다른 견해들 사이에서 중간값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이를테면 사람들이 안철수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그런 '능력'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이명박이든 안철수든 CEO인 한에서는 자신의 판단으로 최종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사람들의 도식화된 환상 속에서 이명박은 그냥 자기 견해를 밀어붙이고 안철수는 자신과 사원 사이 중간견해를 밀어붙인다. 아마 사람들이 안철수에게 기대하는 바는, FTA는 찬성하지만 이번 한미FTA는 반대하고, 해군기지를 만드는 것엔 찬성하지만 그걸 하필 강정마을에다 짓는 것엔 반대하는 그런 위치일 거다. 이렇게 소통이 중간값을 신속하게 찾아내는 능력이 될 때, 사람들은 거기다가 '상식'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상식'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견해의 중간값은 결코 빈도수가 높은 답변이 아니다. 가령 5ㆍ16은 긍정하지만 유신을 부정하는 이, 박정희는 긍정하지만 전두환을 부정하는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대부분 둘 다 긍정하거나 부정할 뿐이다. 물론 평균값이 최빈값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증표가 된다. 그러나 평균값과 최빈값이 근접하려면 각자의 '상식'을 사는 이들 사이 치열한 논박이 필요하지, 신속하게 중간값을 찾아내고 결론을 내리는 능력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상식'의 총합은 별로 '상식적'이지 않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식의 독재'가 아니라 '다른 상식끼리의 소통'일 것이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