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한 교사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대화는 한 토막짜리 도돌이표 노래 같다고 말했다.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을 혼내거나 훈화하는 내용을 보면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매일 똑같은 내용이 무한 반복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지각을 했다. 상습적인 지각생이다. 교사는 지각한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이렇게 말한다. 왜 지각했냐. 늦잠 잤습니다. 늦잠 자면 돼, 안 돼? 안 됩니다. 잘못했지? 네. 내일부터는 늦지 마라. 네. 그리고 이 대화는 또 다음날 반복된다. 똑같은 말을 하는 교사나 똑같은 말을 듣는 학생이나 지겹지도 않은지 모르겠단다. 그 말을 하는 당사자들의 표정을 보면 지겹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무표정일 때가 많다. 둘 다 사실은 자기들이 하는 말에 아무 의미부여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학교'이기 때문에 일어나야만 하는 '의례'에 가깝다.
그 교사에게 그럼 선생님은 지각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물어보았다. 사실 우리 일상생활은 무의미하지만 의례처럼 반복되는 것이 더 많지 않은가. 저 위의 대화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무의미하고 멍청해 보이지만 저 의례적인 언어의 바깥을 생각하고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 그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자기가 교직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학생에 따라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란다. 어떤 학생들은 아무리 야단을 치고 때린다고 하더라도 잠 조절이 안 되는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 학생들은 집에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해 보면 집에서도 노력을 해봤지만 안 돼서 부모님도 손을 놨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사는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길을 택했다. 지각하는 학생과 함께 반에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상의를 했다고 한다. 누구누구는 잠 조절이 안 되니까 우리가 같이 신경을 쓰자고 말했다. 등교 할 때 그 친구의 집 근처에 사는 학생들은 핸드폰으로 전화라도 한 번 하거나 집을 지날 때 "누구야, 학교가자!"라고 한 번 불러주고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효과를 봤냐고 물어봤더니 피식 웃으면서 그런다고 잠 조절이 안 되는 학생이 하루아침에 고쳐지겠냐고 대답하셨다. 대신 다른 효과를 하나 봤단다. 그 전에는 지각을 하더라도 교실 문을 열고 들어 올 때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단다. 그냥 자기가 지각한 거고 그건 자기가 교사에게 야단맞으면 되는 거니까 다른 학생들에게 미안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야, 학교가자." 이후에는 지각을 하면 교실 문을 빠끔히 열고 다른 학생들에게 미안해하며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이 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게 교육이다 싶었다. 그가 한 일은 한 교실에 있는 모두가 만년 지각하는 이 친구와 어떻게 더불어 같이할 수 있는지 지혜를 모으는 것이었다. 혼자서 '안 되는 것'은 다함께 감싸는 거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당사자가 되었다. 한 교실에 앉아 있지만 무관하던 사이를 상관있는 관계로 만드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면 무엇이 교육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보통 생각하는 교육이란 '관계의 확장'이 아니라 그저 지각한 학생, '당사자 한 명'을 혼내서 태도를 교정하는 훈육이다. 그 순간 나머지들은 그 '당사자'와 무관해진다. 이렇게 되면 지각한 학생도, 그 주변의 나머지 학생들에게도 '고마움'과 '미안함'과 같은 주변 사람을 향한 마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사들을 만나 성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관계의 확장'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자기만 생각하고 살다가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나아가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고려하게 되는 것이 성장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관계의 확장이란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교실 문을 열 때 이전과는 달리 미안해하며 살짝 여는 것, 그 집 앞에서 '누구야, 학교가자!'고 한 번 외치는 것, 이것은 보통 큰 성장이 아니다. 이 교사처럼 사람과 사람을 엮지 못하면서 요즘 학생들 자기만 알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른다고 백날 이야기해봤자 헛방인 셈이다.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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