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이 "오명 KAIST 카이스트 이사장은 내가 물러나야할 이유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말 한마디로 자진사퇴를 거부했다. 한때 자신의 허물을 덮어준 동지였으나 지금은 적이 된 오 이시장에 대한 반격이었다. 위기 탈출을 도왔던 은인이 얼마든지 등을 돌릴 수 있고, 이걸 과거의 수혜자는 주저없이 공격하는 전장의 논리가 교육계에도 적용되는 현장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다. 그것도 2년 전에. 2010년에도 우리나라 최고 이공계 대학이라는 KAIST에선 '서남표 파동'이 있었다. 철저하게 성과만 앞세운 소통 부재의 개혁을 교수와 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테뉴어(정년보장) 심사 강화, 100% 영어 강의, 차등 등록금제 따위는 서남표식 개혁의 심벌이긴 했으나, 구성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 게 결정타였다. 전례 없는 초강도의 개혁인만큼 시행에 앞서 치열한 내부 논의를 거쳐야 했으나, 서 총장은 반대 목소리를 누르고 밀어붙이기로 일관했다. 결과는 뻔했다. 교수와 학생들이 연구실과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심각한 학내 갈등이 벌어졌다. 일부 옹호론도 있었지만 리더십의 붕괴를 초래한 서 총장 스스로 물러나야 세계 속의 대학을 지향한다는 KAIST가 정상화 될거라는 목소리가 대세였다. 그때 교육부가 '종결자'로 나섰다. 연임을 시도하는 그에게 사태 해결 차원에서 결자해지를 촉구한 것이다. 교수와 학생 편이라기 보다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KAIST 지도 감독권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됐다. 교육부가 나가라는 데 안 나가고 버티는 총장은 시쳇말로 '무개념', '멘붕' 총장으로 여겨질법 하지만 서 총장은 오히려 교육부를 농락했다. 글로벌 대학을 위한 개혁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이 많다는 군색한 논거를 들이대면서 이사진을 구워삶았다. 오 이사장이 연임 이후의 KAIST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상수(常數)들을 떠올렸다면 그때 서남표 카드를 버렸어야 했다. 교육부의 경질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더 중시했어야 옳았다.
2010년 7월, 4년의 임기 연장에 성공한 서 총장은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연임이 확정된 날 이사회에 약속 했다. 자신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한 불통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묻지마식 개혁은 지양하겠다고 했다.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는 대학이 되도록 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이런 호언은 공언(空言)이 됐다. 서 총장의 독단적인 리더십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곤 보기 어렵지만, 교수와 학생들이 자살하거나 고소 고발이 난무한 상황은 어떻게 설명한 건가. 이러고도 KAIST 이사장에게 "내가 왜 잘려야 되는 지 설명해달라"고 하는 건 코미디 아닌가.
미국 국적에 연 4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아가는 서 총장이 학연 지연으로 얽힌 정글 같은 국내 고등교육계에서 살아남아 KAIST를 세계의 대학들과 당당히 경쟁하는 수준까지 올려놓은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난장판이 된 KAIST가 정상화되려면 그가 나가는 것 방법 밖에는 다른 출구가 없을 것이다. 서 총장의 자진 사퇴 불가 입장과는 관계없이 KAIST 이사회는 이틀 뒤 이사회 열어 계약해지 방식으로 그를 자를 거 같다. 이걸로 서남표 사태는 일단락 되겠지만, 아쉬움은 적이 남는다. KAIST 이사회를 이끄는 오 이사장이 2년 전 이맘때쯤 서 총장을 경질했다면 사태가 여기까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학 강대국에 일조할 영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KAIST 이사회는 실기(失機)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김진각 여론독자부장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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