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정치 기사를 쓸 때 기사 최종본을 취재원들에게 사전 검사받아야 한다면… 수정헌법 제1조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언론 천국'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기사 내용을 '검열'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유력 대선후보의 구미에 맞는 발언만을 기사화하도록 요구받는 일도 허다하다.
16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언론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선거 캠프 관계자와 인터뷰를 하려면 한 가지 조건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캠프의 공보부서가 작성된 기사를 사전에 살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사화를 거부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해야만 취재에 응한다는 것이다. 취재원의 발언에 기자가 해석을 곁들이거나 조금이라도 비유적 표현을 쓸 경우 해당 내용은 여지없이 '기사화 불가' 판정을 받는다. 취재원의 심기를 건드리는 표현도 검열 대상이다. 언론 브리핑을 업으로 하는 백악관 대변인의 발언조차 사전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 캠프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롬니의 아들과 인터뷰할 때 언론 보좌관이 허락하는 발언만을 기사화할 수 있다. 또 보좌진 역시 기자들이 자신들의 발언을 기사에 담을 때 사전에 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
사전 검열까지는 아니지만 의회나 행정부에서 익명을 요구하거나 구체적인 표현을 일일이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논란의 소지가 없는 통상적인 발언에도 취재원들은 '민주당 핵심관계자'나 '공화당 전략가' 등 익명을 요구한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언론 역시 이런 조건에서 인터뷰 약속을 잡는다.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율적 편집권을 향유해 온 미국 언론이 이런 요구에 순응하는 것은 과거보다 취재 환경이 악화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백악관 관계자들은 언론 접촉을 대폭 줄였다. 이에 반해 매체간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정치인들은 트위터 등 언론을 거치지 않고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언론이 정치인의 작은 실수에 집착해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는 등 과도한 경쟁을 벌여온 것도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대선 캠프 입장에선 실언 한 마디가 선거 판세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공보관계자들의 입을 더욱 옥죌 수밖에 없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