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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병아리의 멘탈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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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병아리의 멘탈 붕괴

입력
2012.07.1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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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에 병아리 장수가 나타나 몇 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로 죽었지만 노하우가 생기면서 어느새 네 마리가 한 달 넘게 생존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침 아파트 1층이 집이라 베란다에서 키우는 데, 덩치가 커지고 날개짓을 하게 되더니 바깥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창살 사이로 보이는 작은 아파트 정원이 그들의 눈에는 신록이 우거진 신천지로 보였나보다. 용감히 한 놈이 과감히 점프를 해 뛰어나가자, 나머지도 따라갔다. 본능적으로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이 신기했고, 친환경적으로 키운다는 마음에 놓아기르기로 했다. 며칠 뒤, 동네 아이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에 나가보니 단지안의 길고양이들이 병아리를 잡아간 것이었다. 순식간에 두 마리가 사라졌고, 남은 두 마리의 안전을 위해 양치기 소년같이 방목하는 시간에는 지켜봐주게 되었다. 신천지인 줄 알았던 정원은 그들에게 정글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평온하게 흘렀는데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한 마리가 또 잡혀갔다. 지나가던 아이가 소리를 질러 쫓아가, 목덜미를 물고 달리던 고양이가 놓치고 도망갔다. 구사일생 구출된 병아리는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런데 병아리의 행동이 그때부터 이상해졌다. 활기차게 친구랑 서로 싸우고 뛰어다니던 놈이 가만히 서있기만 하고, 먹이도 물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옆에서 친구가 뛰어다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얼어붙어버린 조각이 된 것 같았다. 놀란 병아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내가 병아리를 감싸고 오랫동안 안아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며칠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차에 이틀 만에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비록 고양이에게 물려 몸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어린 병아리의 멘탈은 붕괴되어버렸고, 신체적 죽음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본의아니게 정신적 외상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생생한 동물실험을 관찰한 셈이었다. 이런 면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요새 유행하는 말 '멘탈붕괴'는 스트레스로 인한 인격과 정체성의 파괴적 손상상태를 의미한다. 많이 놀랐거나, 당황했을 때 웃으면서 쓰지만, 실제 멘탈이 붕괴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지거나,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다고 느낄 때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던 사람은 아예 그 시도를 포기하고 그냥 넋을 놓고 있게 된다. 스트레스 상황에 처음 강력히 저항을 하고, 자원을 최대한 동원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만, 완전히 소진되어 버리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가 된다. 허리케인 조가 무적의 챔피언과 15 라운드를 경기하고 난 후 "다 타버렸어"라면서 링 사이드 자기 자리에서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채 그대로 사망을 했듯이.

흔히 가해자는 "난 손 하나 대지 않았다"면서 폭력을 부정한다. 그러나 언어 폭력을 쓰는 것, 여러 수를 써봤지만 해결이 되지 않아 난망해지도록 몰아넣는 상황에 빠지게 하는 것도 엄연히 폭력이다. 인간의 멘탈은 기본적으로 튼튼하나, 한 번 붕괴되면 수습이 더 어렵고 결과도 파괴적이다. 인간은 병아리보다 훨씬 멘탈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고등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쌍용차 해고자들의 연이은 자살, 대구지역 학생들의 자살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체손상이나 큰 병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는 것을 포기했다. 왜일까. 지루하게 끌려가며 고통을 이어가며 멘탈이 붕괴된 상태로 머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정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병아리보다 인간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벌써 그 징후가 곳곳에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43명의 사람이 자살을 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멘탈이 붕괴되어버리기 전에 수를 찾아야 한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사회는 신천지가 아니라 언제 고양이가 목을 채갈지 모를 정글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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