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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고교에서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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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고교에서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입력
2012.07.1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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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조금 느닷없는 메일을 받았다. 자신을 고등학교 역사 교사라고 소개한 그 분은 자신이 재직 중인 학교에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가끔 있는 특강 요청이겠거니 했으나, 자세히 읽어보니, 특별히 철학반을 구성할 터이니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한 시간씩 1년 동안 철학에 대한 특별 강의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었고 또 최근에 성인 대상으로 대학 외부에서 철학 강의를 진행한 적은 있었지만, 고교에서의 철학 강의, 그것도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강의 제안은 전혀 뜻밖이었다. 일단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답신을 보냈다.

며칠 후 찻집에서 만난 인상 좋은 이 젊은 선생님은 철학 교육에 대한 확신이 흘러 넘쳤다. 논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지금 학생들에게 철학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둘째, 간간히 철학을 가르쳐 보았는데 아이들이 변화되는 것을 목격한 바 있으며, 셋째, 철학적 사유의 매력을 이미 경험한 몇몇 학생들의 욕구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이 흥미진진한 모험에 합류하기로 했다. 며칠 후 나는 수업계획서를 작성해서 선생님께 보냈고, 그로부터 얼마 후 30 명 정도의 고교생들과 철학 여행을 시작했다. 이제 열 번 정도의 수업을 마쳤을 뿐인데, 나는 현재의 변화에 충분히 만족한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아이들이 활발하게 의사 표현을 하고, 열심히 받아 적기만 하던 학생들이 내 이야기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가끔 다소 어려운 내용이 등장해도 도전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이야기에 정당한 논거를 보태려고 애를 쓰며, 철학적 글쓰기 과제물의 수준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이 강의는 매일 아침 출판사 사무실에 출근해서 도서 주문서들을 확인하는 일과 더불어 요즈음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가 되었다.

철학은, 그리고 문학과 예술은,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새큼달큼한 낭만적 고민 따위가 돈을 벌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거리에 뒹구는 낙엽조차 가슴을 뛰게 하던,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시절, 그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을 붙잡고 짐짓 철학자와 시인을 흉내 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목마른 시기에 철학을 배웠어야 했다.

우리가 밥벌이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는 나이가 되면, 자신이 땀을 흘려 번 노동의 대가를 화폐라는 형태를 통해서 보상받는 경험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를 철들기 시작한다고 표현하거니와, 돈과 관련이 없는 인문학은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된다. 그러니 인문학 교육은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오히려 어려워진다. 세상에 모든 쓸모없는 것들은 우리들이 세상의 쓸모 있는 것들을 배우기 전에 배워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이 쓸모 있고 무엇이 쓸모없는지 알기 시작한 후에는, 진정으로 쓸모없는 것들을 배우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교육이 대학에서 가능했었다. 오래 전,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다니던 청년들은 적어도 밥벌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이 나지 않은 인류들이었다. 그러니 철학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쓸모없는 책들을 읽고, 플라톤과 윤동주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취업조차 이렇게 어려워진 지금, 생계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과목들은 대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한낱 몇 권의 철학책에 열광하는 철부지들이 아닌 것이다. 결국 지금 시대에는 적어도 인문학에 관한 한, 고교 졸업 때의 교양 수준으로 거의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대학에서 철학 수업이 없어지고 있다면, 이제 고교에서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옳다. 대학이 생계를 위한 싸움에 투항했다면, 이제 고교생들에게 쓸모없는 학문들을 배울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옳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계획된 과정의 절반인 한 학기가 끝났다. 나는 그 역사 선생님과 생맥주잔을 부딪치며 염려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그동안 잘 한 것일까요? 해주실 말씀 없으신가요?",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그렇게 한 학기만 더 꾸준히 철학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틀림없이 연말쯤에는 모두들 엄청나게 변해있을 겁니다." 그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연신 오징어 다리를 뜯어댔다. '철학주의자' 김상훈 선생님이 근무하는 서울 마포의 숭문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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