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업자 이모씨는 지난해 2월 “M&A에서 자금력을 과시할 수 있도록 20억원짜리 자기앞수표 사본을 구해주면 사용료를 지불하겠다”며 접근한 위조범 일당에게 신한은행 발행 자기앞수표 사본을 건네줬다. 위조범들은 이씨에게서 받은 수표 사본의 일련번호 등을 베껴 액면가 110만원짜리 수표를 20억원짜리로 둔갑시킨 뒤, 은행에서 20억원을 인출해 달아났다.
이씨는 뒤늦게 이를 알고 은행에 항의했지만 “사본을 넘겨준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으므로 돈을 돌려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자 소송을 냈다. 법원은 그러나 은행에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8단독 박정운 판사는 이씨가 신한은행을 상대로 낸 수표금 청구 소송에서 “20억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6일 밝혔다.
재판부는 “범행에 쓰인 변조 수표는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변형돼 있었던 상태”라며 “지급을 유예하거나 수표 주인에게 확인을 하는 등 충분한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돈을 내준 은행에 과실이 있다”고 밝혔다.
은행 측은 이씨가 수표 사본을 넘겨줌으로써 사실상 범죄를 방조했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재판부는 “대가를 받고 자기앞수표 사본을 일정 기간 활용하도록 제공하는 거래는 사채시장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는 거래 유형인 점을 감안하면 수표 사본을 빌려줬다는 사실만으로 범죄를 방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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