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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17일 신사동에 '백스테이지' 여는 박은관 시몬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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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17일 신사동에 '백스테이지' 여는 박은관 시몬느 회장

입력
2012.07.1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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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가방은 자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고 정체성의 산물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여자의 가방> 의 저자인 프랑스 사회학자 장 클로드 카프만) 명품백 하나에 수백만 원을 기꺼이 쏟아붓는 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긴 어려워도, 이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자의 가방, 핸드백은 어떻게 탄생해 ‘또 다른 자아’로 자리잡게 됐을까. 여자들은 왜 명품 핸드백에 열광할까. 명품 핸드백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핸드백 트렌드는 앞으로 어떻게 바뀔까…. 핸드백에 관한 갖가지 궁금증을 풀어줄 핸드백 월드가 곧 탄생한다.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여는 ‘백스테이지(Bagstage)’다. 핸드백 모양을 본뜬 지상 5층, 지하 5층 건물에는 세계 최초의 사설 핸드백 박물관과 핸드백 제작 체험장, 가죽소재 판매점,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무임대료 매장 등이 들어선다.

백스테이지를 만든 이는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은 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의 박은관(57) 회장이다. 시몬느는 버버리, 지방시,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코치, DKNY, 토리 버치 등 22개 유명 브랜드 핸드백을 공급하는 ODM(제조자개발생산) 업체. 전세계 명품 핸드백의 10% 가량이 여기서 만들어지며, 올해 예상 매출액이 5억 달러를 훌쩍 넘는다.

“연극으로 치면 우리는 핸드백이란 작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의 숨은 주역인 셈이죠. 백스테이지(Bagstage)는 말 그대로 핸드백이 주인공인 무대이자, 시몬느가 구축해온 무대 뒤(backstage)의 세계를 장막을 걷고 보여주는 또 다른 무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 회장은 백스테이지 개관에 맞춰 선보이는 자체 브랜드 ‘0914’(onineonefour)를 ‘백 투 온(back to on)’브랜드라고 명명했다. 그간 무대 뒤에서 쌓은 기술력과 문화적 역량을 결집해 무대에 당당히 서겠다는 뜻이다. 지난 10일 오후 경기 의왕시 고천동에 자리한 시몬느 본사를 찾아 ‘백스테이지’와 ‘0914’에 담긴 야심만만한 꿈에 대해 들어봤다.

-독문학 전공(연세대)인데 어쩌다 핸드백과 인연을 맺게 됐나.

진짜 우연이다. 아버님이 인천에서 원양어업을 크게 하셨다. 어망공장, 조선소, 냉동공장, 객주도 운영했다. 형님들도 그러셨고, 나도 어릴 적부터 아버님 따라 배 타고 연근해는 물론 남지나해, 동지나해까지 누볐던 터라 집에선 당연히 가업을 이을 줄 아셨다. 그런데 전문성도 없이 오너 아들이라고 사장 하는 건 아니다 싶어 아버님께 ‘3년만 사회경험 해보겠다’고 하고 입사한 곳이 핸드백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인 청산이었다.

-대기업에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별 생각 없이 학교에서 모집공고 보고 찾아갔는데, 쇼룸을 갖춰놓고 수출 많이 하는 회사라니 끌리더라. 79년 12월이었다. 이듬해 3월 이탈리아로 첫 출장을 갔다가 문화적 쇼크를 받았다. 베네통이 막 론칭했을 무렵인데 세상에 남자 바지가 팔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 다 있는 게 어찌나 놀랍던지… 색깔별로 바지 7개, 티셔츠 12개를 사왔다.(웃음) 그렇게 일에 빠져들었는데, 배울수록 정말 신나고 재미있었다.

-어릴 적부터 패션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나.

전혀 아니다. 부지런히 뛰어 새로운 소재와 스타일 개발하면 4,5개월 뒤 전세계 어디서든 내가 만든 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그 성취감이 대단했다. 대우, 삼성, 쌍용 같은 대기업에 간 친구들이 하는 조선이나 자동차, 전자, 금융 일은 그림으로 치면 200호, 300호짜리 대작이고, 내 일은 10, 20호짜리 소품인데도 내 것이 훨씬 예뻐 보였다. 그 친구들은 조직의 부속품이지만, 나는 내 캔버스에 좋아하는 색깔로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니까. 열심히 하면 리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사 1년 반 만에 대리 달고, 6개월 뒤 과장, 1년 뒤 차장, 또 1년 만인 스물 아홉에 수출총괄부장이 됐다. 87년 창업해 나올 때까지 회사 매출도 10배 가까이로 늘었다.

-3년만이라던 약속이 7년이 되고, 창업까지 한다니 부친 반대가 심했겠다.

‘뭐, 여자 핸드백 만든다고?’ 하며 못마땅해하셨다. 7년 전 돌아가셨는데, 사업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성과도 내니 인정은 해주셨지만, 핸드백이 뭔지, 패션이 뭔지, 왜 내 아들이 저걸 좋아라 하며 신나서 뛰어다니는지 근본적인 의문은 못 푸셨을 거다.(웃음)

-시몬느는 무슨 뜻인가. 처음엔 침대 회사 아닌가, 했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침대 회사는 시몬스다.(웃음) 연애할 때 집사람에게 붙여준 애칭이다. 프랑스에선 흔한 여자이름이고, 독일어로는 지몬인데, 당신, 이상형 그런 뜻이다. 자체 브랜드 ‘0914’도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날인 9월14일에서 따왔다. 대학 때부터 사귀다 집사람이 미국 유학 떠나면서 헤어졌는데 2년 만인 84년 9월 13일 밤에 만나는 꿈을 꿨다. 다음날 오후 회사 땡땡이 치고 연애할 때 아지트였던 경복궁 앞 카페에서 혼자 커피 마시고 있는데, 시몽이가 꿈속에서처럼 나타났다. 그렇게 다시 만나 결혼했다.

-회사명에 브랜드명에까지 부부의 사연을 담은 걸 보니 금슬이 무척 좋겠다.

운명이라고 믿지만, 아직까지 가슴 떨리고 허리에 번갯불 맞은 상처를 안고 살고 그렇진 않다.(웃음) 다른 50대 부부처럼 대화도 부족하고 소통도 안되고 갈등도 있고 그렇다.

-아무리 경험이 있다 해도 창업 결심이 쉽지 않았을 텐데.

청산에서 당시 미국 시장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에스프리와 계약을 하려다 이미 거래하고 있던 경쟁업체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 창업 계기가 됐다. 처음부터 고급 핸드백 시장을 보고 뛰어들었다. 토털패션이란 개념이 미국 등으로 확대되고 옷만 취급하던 디자이너 라인에서 핸드백에 진출하려던 무렵이었다. 럭셔리 핸드백 시장이 앞으로 엄청 커질 텐데, 유럽 제조공장만으로는 감당이 안되니 아시아에 기회가 올 거라고 판단했다. 핸드백 한다니까 다들 ‘좋은 시절 다 지난 봉제업 아니냐, 왜 막차를 타느냐’고 말렸다. 내가 곡괭이 들고 침목 놓고 철길 깔고 하면 그게 내 길이지 왜 막차 타는 거냐고 했다.

-첫 작품인 DKNY 계약은 어떻게 뚫었나.

미국 백화점에서 DKNY 제품 7개를 사고 이탈리아에서 가죽 구해다 견본을 만들어 무작정 바이어를 찾아갔다. 진짜 한국서 만든 거냐고 놀라더라. 가격도 유럽산보다 30~40% 싸게 공급하겠다니 솔깃해했다. 그런데 마케팅 쪽에서 우리 고객은 ‘메이드 인 프랑스, 이태리’만 찾는다고 했다며 거절했다. 밤새 논리를 만들어 다음날 또 찾아갔다. ‘당신네 거래하는 이탈리아 공장이 지금이야 3대째라지만 1대 할아버지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맨땅에서 시작했을 거 아니냐. 아시아에서 고급 핸드백 생산을 기획한 선구자가 되고 싶지 않냐. 정 안되면 너네 물량의 100분의 1만 달라.’ 그렇게 매달려서 두 스타일 240개를 받아왔는데, 재수 좋게 잘 팔렸다. 주문량이 600개, 1,200개로 늘더니 6개월 후엔 디자이너를 보내서 새 제품 한번 개발해보라 하더라. 아시아에서 세계적 명품 핸드백의 제조는 물론, 기획ㆍ디자인까지 한 첫 사례였다. 입소문이 퍼지니 다른 업체들에서도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그 후 가장 큰 난관은 무엇이었나.

물량은 느는데 서울 근교에 그만한 공장을 지을 땅도 없었고, 인력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91년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기로 했는데, 거래업체들 반대가 심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였다. 겨우 설득해 공장 짓고 품질관리 철저히 해 합격점을 받았다. 핸드백 분야에서만은 ‘메인드 인 차이나’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으니, 중국 정부에서 나한테 훈장 줘야 한다.(웃음) 중국 홍콩 대만 등에도 우리를 따라하는 업체들이 생겼는데, 그분들이 시몬느 덕이라며 한참 어린 저를 ‘따거’(형님)라고 불렀다.

-패션 시장에서 핸드백의 비중은 얼마나 되나.

20년 전만 해도 명품 패션 시장은 옷이 30%로 가장 컸고, 핸드백은 12%였다. 지금은 옷이 25%, 패션 액세서리가 29%인데 그중 80%가 핸드백이다. 단일 아이템으로는 가장 크다.

-여자들이 왜 명품 핸드백에 열광할까.

심리학자 등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명품 소비 전반에 관한 건데, 명품 구매가 자신이 그만한 소득, 문화적 계층에 속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럭셔리 브랜드들의 마케팅 포인트가 바로 그거다. 둘째, 같은 명품이라도 핸드백이 효용성이 높다. 옷은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6,000원, 1만원짜리 사 입으면서 백은 100만원, 200만원짜리 드는 게 요즘 추세다. 수백만 원 주고 산 조지 아르마니나 샤넬 옷, 1년에 몇 번이나 입겠나. 패션 좀 아는 이들 사이에서 ‘쟤는 지난 번 어디에서 입었던 옷 또 입고 왔네’란 말은 가장 큰 모욕이다. 핸드백은 그렇지 않다. 좀 저속하게 얘기하면 핸드백은 과시하기에도 좋다. 옷은 나 뭐 입었다고 뒤집어 보여줄 수 없지만, 핸드백은 펜 꺼내는 척 하고 탁자에 올려놓으면 다 알아본다.(웃음) 끝으로, 여자들이 늘 들고 다니는 핸드백은 삶의 체취와 추억이 진하게 묻어있는 아이템이다. 청소하다 창고에서 대학 시절 들고 다니던 배낭 하나만 봐도 ‘복동이하고 헤어질 때 들었던 거네’하고 추억을 떠올린다. 이처럼 스토리가 있고, 효용성 높고, 과시하기 좋고, 일정 수준 이상의 계층에 속한다는 심리적 위안까지 안겨주는 아이템이 또 있을까.

-결국 명품 소비에 거품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맞다. 그래서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 이후 진정한 가치 혹은 정직한 소비를 추구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핸드백의 가치나 효용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일상용품을 담아 들고 다니는, 지금과 같은 핸드백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핸드백 제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2차 세계대전 이후다. 60, 70년대부터 산업자본이 패션계에 발을 들이면서 학자 작가 등을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브랜드의 정체성부터 스토리,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내 친구 중에 페라가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있다. 이 친구가 도서관 가서 패턴 연구해 스카프를 디자인했는데, 13세기 대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친 저녁 햇빛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광고하는 식이다.(웃음) 이런 방식이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 러시아 같은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에서는 앞으로도 20,30년은 통할 거다.

-자체 브랜드 ‘0914’에는 어떤 스토리, 어떤 판타지를 담았나.

판타지나 스토리를 만들어내기보다 우리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줄 작정이다. 내 33년 경력을 포함해 본사 직원 250여명의 핸드백 경력을 모두 합하면 작년 말 기준으로 3,010년에 달한다. 이게 우리의 최대 자산이고, 이걸 바탕으로 25년간 세계적 럭셔리 브랜드 핸드백을 만들어온 숨은 주역이라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고급 핸드백을 지향한다면 그런 과거를 지우는 편이 유리할 텐데.

더 쉽게 하자면 유럽에서 한때 잘 나갔다가 망했거나 경영이 어려운 브랜드 사다가 리바이벌 하면 빠르다. 그렇게는 안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선진국의 명품 시장은 분화가 시작됐다. 판타지를 덜어내고 제품력으로 승부하는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도 이제 파리 밀라노 등 유럽 정서에 기대지 않고 우리 문화와 정체성으로 승부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성숙도가 엄청 높아졌고, 한류나 박지성 김연아 같은 운동선수들의 활약도 다 도움 된다. 또 전세계 일류 디자이너스쿨 재학생의 25~30%가 한국학생이다. 20년 전엔 패션계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3대 커넥션이 꽉 잡고 있었는데, 이젠 한국 커넥션이 제일 크다. 대가리, 즉 브랜드만 없는 거다. 시몬느가 그런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거다.

-명품병이란 말까지 나오는 한국 시장에서 먹힐까.

선진국처럼 머지않아 시장 분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이미 의류 시장에선 유명 브랜드들이 홍역을 앓고 있지 않나. 론칭은 백스테이지 한곳에서만 한다. 유명 연예인 데려와 광고하고 행사하고 그런 것도 일절 안한다.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가 우리 모토다. 2년간 준비해 지갑류까지 300 스타일을 개발했다. 매달 새로운 제품을 선보인다. 길에서 흔히 보는 3초백, 5초백이 아니라 독창적인 제품을 다양하게 제공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입소문 듣고 찾아오게 하겠다는 거다. 40만~120만원대 가격에 럭셔리 브랜드 수준의 제품을 제공하는 건데, 당장 꽃을 보진 못하겠지만 20, 30년 뒤엔 글로벌 브랜드로 성공할 자신이 있다. 도산공원 앞에 2년 뒤 플래그숍(본점)을 내면 본격적인 마케팅에 나설 계획이다.

-백스테이지 프로젝트에 돈이 제법 들었을 것 같다.

땅값 포함한 총비용은 200억원이다. ‘시몬느 핸드백 박물관’에만 40억 가량이 들었고, 그 중 절반이 300여점의 소장품 구입 비용이다. 박물관은 기획단계부터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인 영국 큐레이터 주디스 클라크에게 맡겼다. 예일대 출판부와 손잡고 도록과 박물관을 만든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책자도 개관에 맞춰 영어, 한글판 동시 발간한다.

-백스테이지에는 어떤 꿈을 담았나.

핸드백이라는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박물관에는 핸드백의 어제 즉 역사가 담겨있고, ‘0914’매장이나 핸드백 제작 체험장은 핸드백의 오늘, 유망한 신진 디자이너들의 무임대료 매장은 핸드백의 내일을 보여줄 것이다. 누구나 2시간쯤 이 건물에서 머물다 나올 땐 구매한 핸드백이든, 머리에 넣은 지식이든, 가슴에 품은 꿈과 열정이든 어디엔가는 핸드백을 담아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이희정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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