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정치가 범람한다. 총선이 지났고 이제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다. 정치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강 건너 불처럼 구경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정치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단순히 손 놓고 있기도 어렵다. 국민 개개인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건전한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정치가 사회 모든 분야에 침투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4~5년마다 되풀이 되는 선거 때문에 국정의 방향이 오락가락하고 그에 따른 피해를 국민들이 오롯이 입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 분야에서 최근 언론에 제시된 화두는 '국립대 체제 개편'에 관한 논의, 이른바 '서울대 폐지론'이다. 기존의 국립대를 하나의 통합네트워크로 묶어 지역별로 특성화된 캠퍼스로 편성해 대학 서열화와 학벌철폐를 도모한다는 안이다. 제대로만 된다면 입시 과열 경쟁 해소, 고교교육 정상화, 지방 국립대 살리기, 지역균형 발전 등과 같은 여러 마리의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할 만하다.
국립대 체제 개편안은 단순히 대학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니고 입시 정책, 중등교육, 지역 발전, 고등교육 재정, 교육에 관한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 문제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전사회적인 아젠다이다. 고등교육의 경쟁력강화, 초중등교육 정상화, 입시 과열 경쟁과 같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교육계에서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시도해 볼 만한 안이긴 하나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선 먼저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이른바 서울대 폐지론은 정치로부터의 교육 독립이라는 포괄적인 조건이 충족돼야만 실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사안이다. 이 사안은 한 정권이나 정파의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사회 전체의 합의를 바탕으로만 실현 가능한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아젠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각종 교육제도는 정권이 바뀌면 위정자의 입맛에 따라 수시로 변해 왔다. 입시제도의 변화무쌍한 변화 때문에 국민들은 늘 혼란스러워 했고, 좌우 이념 대립 때문에 중등교육 정책은 우왕좌왕하고 있으며, 대학에 대한 정권의 개입은 이미 도를 지나친 상황이다.
국민들은 아이들의 장래를 특정 정치권력에 따라서 조변석개하는 교육정책에 내맡기는데 지쳐 있다. 적어도 아이들 교육은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마련된 준영구적인 원칙에 따라 안정적으로 시행되는 정책에 맡기고 싶은 것이 평범한 시민들의 속마음이다. 이른바 서울대 폐지론도 이 같은 대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을 정치로부터 떼어내는 한 가지 방안으로 국가교육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 교육 정책의 집행기구인 교육과학기술부와 별도로 정권과 정파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으면서 교육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헌법적 기구로서의 국가교육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얘기다. 여기서 교육 전체의 기본 철학과 그에 따른 핵심적인 교육정책의 방향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하게 되면 교육의 정치 종속성 때문에 나타나는 국민의 혼란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정치 권력은 행정이나 법률, 부의 배분과 같은 하드웨어적 수단으로 국민의 생활을 통제하고 조정한다. 그러나 국민의 생활은 교육이나 문화와 같은 소프트웨어적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크게 받는다. 정치가 정말 국민의 생활을 긴밀하게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행정명령이나 전략적 의사소통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세계에 대한 뿌리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리적 의사소통을 끌어내야 한다. 법률이나 행정과 같은 형식적 합리성이 아니라 국가를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하고 국민의 생활세계와 소통하는 실질적 합리성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성에 대한 비판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나마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토대로 사회구성을 시도하고자 하는 하버마스의 시도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국가교육위원회는 법률이나 명령, 국가기구와 같은 하드웨어적 제도에 국민의 실질적인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합리적 의사소통의 숨결을 심어놓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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