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와 이발사/에트가 힐젤라트 지음ㆍ배수아 옮김/열린책들 발행ㆍ584쪽ㆍ1만3,800원
학구적인 소년이 친구 아버지 가게에서 이발사로 일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입대한다. 종전 후엔 중소 암거래상으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다 분쟁지역 테러리스트로 이름을 날린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연상케 하는 소설의 줄거리를 보고, 걸출한 스릴러물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작가는 엉뚱하면서도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이 소년이 입대한 군대가 히틀러 경호부대인 SS부대인데도? 전쟁에서 한 일이 유대인 대량학살인데도? 이야기는 이런 도발적인 질문에서 시작한다.
유대인의 외모를 타고 났지만, 아리아인의 피가 흐르는 주인공 막스 슐츠와 독일인의 외모를 지녔지만, 유대인인 이치히 핀켈슈타인은 같은 동네, 같은 날 태어나 단짝 친구로 함께 자란다. 차이가 있다면 막스는 아버지가 5명이나 되는 콩가루 집안에서 이발사가 되려 하지만, 이치히는 성실한 '이발 거장'의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이으려 한다는 것. 어느 날 의붓아버지를 따라 히틀러의 연설을 들으러 간 막스는 분위기에 휩쓸려 나치 부대에 지원하게 된다. 의붓아버지에게 몽둥이세례를 받으며 자란 막스는 '한 명 이상의 희생자를 원했'(76쪽)고, '심심풀이로 유대인 몇 놈을 잡아 죽이곤'(96쪽) 한다. 예컨대 별 다른 죄책감 없이 러시아 유대인 숲에서 3만 명을, 폴란드 라우브발데에서 20만 명을 학살하는 식이다. 그 현장에 자신의 소꿉친구 이치히와 그 가족들이 있지만 말이다.
전쟁이 끝난 후 막스는 신분세탁에 들어가 자신이 죽인 친구 이치히로 살아간다. '왼쪽 팔뚝에 새겨진 SS대원 문신을 제거한 다음'(231쪽) '성기 끝 부분의 표피를 잘라 내는 수술'(233쪽)도 받아가면서. 유대인 전통의식인 할례까지 받은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으로 일반에 알려지고, 학살 현장에서 모은 유대인 금니를 팔며 새 인생을 도모한다. 암거래상에서 만난 백작부인을 정부로 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면서. 하지만 막스는 '반유대주의자'였던 백작부인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고, 부인과 도모한 새 사업이 실패로 끝나자, 분쟁 지역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기로 한다. 백작부인과 함께 만난 한 남자의 이 말 때문에.
'자긍심 강한 유대인이라면 벌써 팔레스타인으로 갔을 거예요.'(269쪽)
이제 막스는 이발사 이치히 핀켈슈타인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살며 유대국가 건설에 누구보다 앞장선다. 막스가 '남부러시아 지구로 진격했을 때'(98쪽) 사살한 3만 명 중 살아남은 여인 미리암과 늦깎이 결혼도 한다. 허풍이 센 막스는 이발소에서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떠벌리다, 얼떨결에 유대인 테러리스트 단체에 가입하게 되고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아랍전쟁에도 참여한다. 이렇게 완벽한 유대인으로 살던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오는 배에 함께 탔던 판사를 이발소에서 다시 만나며 종전 후 모습을 감춘 막스 슐츠의 행적에 관한 내기를 한다. 판사가 막스의 사망 기사를 들이밀자 발끈한 막스는 자신의 과거를 토설하며 '대부분의 대량학살자들은 자유롭게 유유히 살고 있다'(553쪽)고 말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행동은 '무죄!'(550쪽)라고 선언하면서.
유대계 독일 작가가 가해자의 시점에서 홀로코스트를 재구성한 이 소설은 1971년 미국에서 출간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에 연이어 출간되며 500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렸다. 하지만 집단적 유죄의식이 남아있는 독일에서는 출판사 60여 군데에서 퇴짜를 받은 끝에 1977년 소규모 문학출판사에서 일부 내용이 삭제된 채 출간됐다. 국내에는 소설가 배수아씨의 유려한 번역으로 이번에 처음 선보인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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