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잡으려고 고생 많으셨지요. 그런데 이제 저 없어서 심심하시죠? 저번에는 희동이 아저씨와 또치 아저씨가 와주셨어요. 여기서 나가면 제일 먼저 찾아갈게요. 기다려 주세요."
올 3월부터 서울 강동경찰서 여성ㆍ청소년계에는 매달 한 번 꼴로 특별한 편지가 온다. 곳곳에 하트(♡)와 웃음( )이 가득하고 '또치'(이윤석 경사)나 '희동이'(김한철 경위) 같은 애칭도 담겨있다. 얼핏 보기엔 장난기 많고 발랄한 여느 15세 소녀의 평범한 편지. 하지만 이 편지에는 남다른 사연이 담겨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여중생 갈취범'. 번화가 한복판에서 여학생 50여명으로부터 상습적으로 스마트폰, 노스페이스 점퍼, 카메라 등 3,5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은 혐의로 올 2월 붙잡힌 정보영(15ㆍ가명)양이다.
노란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한 정양이 처음 경찰서에 붙잡혀왔을 때만 해도 태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조사 과정에서 반성을 하기는커녕 "다시 나가면 학생들 돈 뜯어 맛있는 거 사먹고 싶다"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늘어놨다. 함께 조사를 받던 아이들에게는 "뭘 쳐다봐 눈 깔어"라며 싸움을 걸어 경찰들의 골치를 썩였다.
그러던 정양의 마음을 열게 한 건 '떡볶이 한 접시'였다. 정양이 유난히 떡볶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김한철 경위가 "귀여운 아가씨가 험한 말을 하면 되겠니? 예쁜 말만 쓰면 떡볶이 원 없이 사줄게"라며 눈높이를 낮춰 다가갔다. 경계심만 보이던 정양도 "형사님은 좋으니까 다 말해줄게요"라며 태도가 바뀌었다.
정양에게 조사가 아닌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김 경위는 수시로 유치장을 찾아 정양의 가정 형편과 고민, 진로에 대해 조언했다. 정양도 깊은 속내를 털어놨다. 어머니가 재가해 외할머니 손에서 큰 성장 배경, 중학교에서 소위 '일진'들과 어울려 다니며 방황했던 일까지 줄줄이 나왔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진한 그리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얘기했다.
이번엔 경찰들이 더 마음을 열었다. 정양의 사정을 알게 된 여청계 직원들은 서로 정양의 멘토를 자처하고 나서면서 특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구치소에 있는 정양을 꾸준히 면회했고 편지도 주고 받았다.
"저 성동구치소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여기 들어온 지 3일 됐지만 적응이 안돼요. 다들 저 나가기 힘들다고 하네요. 정말 눈물이 수도꼭지 단것처럼 펑펑. (중략) 집에서 면회 한 번도 안 왔습니다."
"저번 재판 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면회오실 때마다 형사님들 이야기 해요. 많이 도와주신다고.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영치금도 잘 썼어요."
1심에서 6개월 보호처분을 받은 정양은 현재 경기 남양주시 한 청소년 보호시설에 수감되어 있다. 정양의 외할머니 정모(59)씨는 "누구에게도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던 아이가 여청계 경찰관들을 만나면서 달라졌다"며 "'할머니 속 그만 썩일 게 미안해'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김용태 강동경찰서 여청계장은 "범죄의 늪에 빠진 아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며 "청소년 범죄는 처벌보다 교화가 우선인 만큼 멘토들이 지속적으로 상담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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