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망가진다. 잘못 된 말을 쓰거나 불필요한 중첩으로 무거워진 말을 써서다. 전자의 말의 대표적 예는 "1,000원이세요"와 같은 말이다. 주로 주유소와 편의점, 대형마트, 백화점 점원들이 즐겨 쓰던 이 '접객 용어', 또는 '계산대 말'이 이제는 어지간한 중년층에서도 쓰인다. 우리말의 '세'가 '시어'의 준말이고 선어말어미 '시'가 '주체 높임', 즉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고 말할 때나 쓰인다고 백 번 얘기해도 소용이 없다.
■ 자신을 낮추면 상대를 높이는 것과 같다는 산술적 설명도 무의미하다. 그저 스스로를 낮춘 '입니다'만으로 충분히 공손한 말이 되니 앞으로 "1,000원입니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수시로 귀를 괴롭히는 이런 말과 달리 시쳇말로 '배운 사람들'이 엉뚱하게 만들어 쓰는 말은 귀가 아니라 머리를 괴롭게 한다. 나지막이 말해서는 듣는 사람이 없어선지는 몰라도 반복과 중첩으로 두툼해진 겹말 이야기다. 두드러진 예가 접미어'감(感)'의 남용이다.
■ 신문과 잡지는 물론이고 우리말 길라잡이라는 방송에도 으레 등장하는 '행복감' '우려감' '불안감' '실망감' 등의 말이다. '행복' '우려' '불안' '실망' 등이 한결같이 이미 어떤 정서나 감정의 상태를 가리키는데도 굳이 '감'을 덧붙여 쓰는 이유를 헤아리기 어렵다.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역전 앞''외갓집' 같은 겹말의 어색함을 이리도 까마득히 잊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언어 감각보다 지식이 웃자라버린 지식층의 비극이다.
■ 가장 비극적인 결과가 '반딧불이'다. 우리말 '반디'는 개똥벌레와 같은 말이다. 그 반디가 내는, 또는 반디에서 나오는 불빛이 '반딧불', 즉 형광(螢光)이고 그와 비슷한 빛을 내는 전기등이 '형광등'이다. 생물학자나 환경론자들이 즐겨 쓰며 퍼뜨린 '반딧불이'는 '반딧불을 내는 놈'이란 뜻이다. 바꿔 말하면 '반디가 내는 불을 내는 놈'이다.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 쭈그러진 마당이어서 바른 생각, 바른 소리를 들을 일이 더욱 드물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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