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시절 반에서 10등 언저리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중간고사는 15등, 기말고사는 13등정도 했던 것 같다. 운이 좋아 9등이나 8등을 하면 어머니께 소고기를 요구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짜고 부정행위를 통해 5등까지 성적을 올렸고, 그 대가로 삐삐를 하사받기도 했으나 곧 들통 나서 선생님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어머니는 학교에 불려 다녀야 했다. 뭐 다 지난 일이지만, 결론적으로 전교는커녕 반에서도 3등 이내에 들어본 적 없다.
곧 올림픽이 시작된다. 런던에 가는 선수들은 해당 종목 최고의 선수들이다. 그들은 범인이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가졌고, 재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다 한 젊은이다. 그들을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을 위해 국가가 조성한 체육 시설에 입주시키고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하는 현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누구도 국가대표가 된 젊은이만큼 열심히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사실, 그들이 대한민국 대표라서 응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최선을 다해 4년을 준비한 청춘들이기에 응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금메달을 꿈꾼다. 금메달과 은메달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목표 금메달 수를 설정하고 종합 10위 안에 들겠다고 공언한다. 방송사는 금메달이 유력한 선수의 집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가 예상대로 그 선수가 우승을 하면 선수의 부모님을 인터뷰한다.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도 금메달리스트들을 앞장세우고 그들에게 대형 태극기를 들게 한다. 성적에 따라 다른 연금이 지급되며 당연히 금메달이 가장 많은 돈을 받는다. 금메달 개수로 올림픽 종합 순위를 매기고(어디서 결정된 기준인지 알 수 없다), 은메달이 아무리 많아도 금메달 하나의 가치에 못 미친다.
하지만 은메달과 동메달도 사실 대단한 것이다. 반에서 2~3등도 하지 못한 내게, 세계에서 2등 혹은 3등을 한 그들은 화가 나면 녹색 괴물이 되거나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고 고담 시티를 구하기도 하는 슈퍼히어로처럼 보인다. 우리와 능력치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능력을 뒷받침하는 노력치가 다른 것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당시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했던 강초현 선수는 다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 한 발을 실수해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획득하게 되었다. 19세에 불과한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했던 말은 이렇다. "내 안의 나에게 졌다." 나는 서른 두 살이지만 내 안의 나에게 만날 진다! 오늘 아침에도 5분만 더 자라는 '내 안의 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굴복해 지각의 위기를 겪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당시 독보적인 기술을 선보인 한국 체조 선수가 있었다. 심지어 선수의 성인 '여'를 기술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오직 세상에서 여홍철만이 '여' 기술을 도마 위에서 선보일 수 있었다. 1차시기까지 그는 압도적으로 1위를 달렸다. 아직 본인의 기술을 완벽하게 보여주기도 전이었다. 2차시기,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었던 그는 착지에서 큰 실수를 하고 만다. 그리고 은메달. 그는 두 팔을 벌려 자신의 착지를 알린 뒤,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선수단의 은메달은 우리의 뇌리에 가장 강력하게 남아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로 극화되기도 했던 이날의 결승전은 사실 인간이 만든 어떠한 장르도 표현하지 못할 숭고미가 있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한 뼘 더 높이 뛰고 한 박자 더 빠르게 움직이는 선수들의 투혼을 보며, 계속되는 연장전처럼 눈물이 흘렀다. 그 경기를 생중계로 보고 있는 순간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을 만큼.
며칠 후, 런던 올림픽이 열린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올림픽의 메달 숫자가 국력이나, 시민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저, 그들의 힘차고 아름다운 움직임에 감동할 뿐이다. 그들의 꿈이 이뤄지도록 응원할 뿐이다. 메달 권에 들지 못하는 수많은 선수들이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숱한 종목에서 그들은 정직한 땀을 흘렸다. 그 땀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로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들이다.
서효인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