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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표식을 부과하는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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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표식을 부과하는 사회에서

입력
2012.07.1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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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은빛 양탄자처럼 전시장 바닥에 얕게 깔린 사탕더미에서 사람들이 마음 가는대로 사탕을 집어 든다. 그러면 네모난 은색 셀로판지에 싸여있던 연녹색빛깔 사탕은 이내 혹은 언젠가 그들 각자의 손과 혀 위에서 개인적인 즐거움을 만들어낼 것이다. 또 거창하게 상상하자면 각자의 삶에서 특별하고 달리 대체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되어 줄지 모른다. 미술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다는 안내에 약간 들뜬 마음으로 사탕을 집어 든 그 이가 미술전문가든 동네주민이든, 아시아인이든 서구인이든, 시인이든 정치인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연금을 받는 노인이든 대출이자에 힘겨운 직장인이든 간에 말이다.

현재 서울 중구 태평로2가에 위치한 갤러리 플라토에서는 쿠바 태생의 미국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 작가는 1957년에 태어나 96년 에이즈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38년을 살았고, 정작 현대미술가로 활동한 시기 또한 길게 잡아도 십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요절함으로써 영원히 젊은 작가로 남은 곤잘레스-토레스는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논쟁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작품들, 지속적으로 소진되면서도 무한히 채워질 수 있는 작품들로 긴 사후의 생을 살고 있다. 서두에 쓴 사탕더미는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일명 '플라시보'라고 불린다. 진짜 약이 아님에도 치료 효과를 발휘하는 위약(僞藥)을 뜻하는 용어가 붙은 그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에이즈로 죽은 연인이 건강했을 때의 몸무게와 자기 몸무게를 합친 중량의 사탕으로 그들의 사랑을 현재화했다. 중요한 점은 그 사탕작품이, 전시 때마다, 심지어 작가가 부재한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관객 모두에게 나눠지는 방식을 원칙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곤잘레스-토레스는 그렇게 해서 둘의 개인적 연애사에 한정된 미술이 아니라, 원하는 때 언제고, 원하는 곳 어디에서나,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자유에 따라 조성하고 분배하는 독특한 미술을 창조해냈다. 거기서 혹자는 제3세계 출신 이민자,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표식이 붙었던 작가의 정치적 저항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이 원했던 것은 그런 메시지의 집단적 고정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감상자가 자기 나름대로 작품의 질과 의미를 향유하는 자유였다.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이름, 지위, 정체에 따른 차별이나 억압적 판단에서 벗어나 각자에게 고르고 개별적으로 내밀하게.

예술작품은 무릇 그런 것이다.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생해 공공적인 것이 되고, 공공의 영역에서 개개인에게 고르고 내밀한 감수성의 부분들을 만들어내도록 돕는 것. 현실 질서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차별, 억압, 부자유, 부적합을 넘어 사회 구성원마다 자신들의 마음과 의지로 서 있고 그렇게 자존감을 유지하며 사는 일을 긍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가장 큰 정치적 역량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도종환의 시를 시인이 정치인이 됐다는 이유로 삭제 요구한 사건은 그 자체로 난센스다. 시인의 작품은 발표된 이상 그 한 인간의 복사물로 멈춰있지 않다. 그것은 예컨대 학생 각자의 사고와 경험에 흘러들어가는 여러 질료들 중 하나로서 독자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워진다. 결국 해당 기관이 요구를 철회하며 일단락된 이 논란에서 특히 기이한 점은 '교육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 그 교육관련 기관이 정작 현실정치의 손익계산에 따른 속내를 내비췄다는 점이다. 또 과거 시인 도종환의 예술에 대고 현재 정치인 도종환의 이름으로 단죄하려 했다는 점이다. 일종의 표식을 부과해 공론장에서 격리시키려 한 것처럼 뵌다. 사실 사회는 부득불 개인에게 특정 표식을 부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언제부턴가 왜곡된 의도로 상대방에게 딱지를 붙이고 있다. 되든 안 되든.

강수미 미술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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