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한국영화를 봐 오면서 든 생각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이 절규를 하는 장면, 소위 '절규의 순간'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절규란 비명과는 좀 다르다.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처럼 너무너무 무서운 대상이 가하는 극도의 위협 때문에 나오는 것이 비명이라면 한국영화의 절규는 특정 대상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상황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자신을 옥죄고, 도무지 해결책이 안 보이고, 어느 순간 중압감이 극에 달했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가 바로 절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절규의 순간이다.
얼마 전 영화평론을 쓰는 지인을 만나 물어봤다. 정말 한국영화에는 절규의 순간 같은 게 있냐고. 그러자 그 분이 실제로 그런 가설이 있다며 자신이 아는 해외평론가의 일화를 들려줬다. 그 해외평론가는 거실에서 한국영화를 볼 때마다 부인이 방에서 나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지금 보는 거 한국영화지?"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처절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부인의 답변에 그는 과연 그런지 한국영화들을 꼼꼼히 연구하며 다시 보았다. 그 결과 정말로 한국영화에는 절규의 순간이 매우 빈번히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고 결국 그는 그에 대한 비평문을 쓰기에 이르렀다.
해외평론가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한국영화에서 절규의 순간은 일종의 내러티브 장치 같은 것이다. 한국영화는 소위 '고전적 내러티브' 단계를 경험하지 않았거나, 또는 식민지 시대와 전쟁으로 그 경험을 상실했다.. 따라서 내러티브의 전개가 논리적이지 않고 필연적이지 않을 때, 쉽게 말하면 자연스럽지 않을 때, 씬과 씬 사이에 절규의 순간이 삽입됐다는 것이다. 절규는 땜질 같은 것인데 동시에 땜질인 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절규라는 형태의 충격요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매우 재밌게 들었다. 궁금했던 것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왜 꼭 절규여야 할까. 예를 들어 우리는 어색하거나 곤란하면 "아하하하"하고 웃으며 은근슬쩍 그 상황을 넘어가기도 한다. 왜 폭소가 아니라 절규여야 할까? 왜 "아하하하"가 아니라 "으아아아"인 것일까. 한국영화의 '절규의 순간'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넘어선 보다 거시적인 맥락,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가 있지 않아야 할까.
나는 이런 궁금증을 갖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한 후배에게 물었다. "최근에 절규해본 적 있어?" 후배가 답했다. "네, 차 안에서, 음악 크게 하고." 또 물었다. "자주 절규해?" 후배가 답했다. "요새는 덜한데 예전에는 자주 그랬죠." 다른 선배에게 물었다. "형은 절규해요?" 선배가 답했다. "할 시간도 없고 할 곳도 없다." 하긴 그 선배는 가정이 있으니 가족 앞에서 절규하면 가족들 전체가 절규하는 난감에 상황에 이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가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노래방에 가는 거야. 노래방에서 하는 게 그게 노래냐? 절규지."
절규의 순간은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절규의 순간은 삶에도 있다. 혼자 사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절규한다. 가족과 사는 사람은 절규가 아니라면 '절규 대체재'가 있다. 사는 것이 참으로 처절하다는 말이다. 사회 곳곳에서 절규 소리가 들린다. 심지어 "나는 행복해요"라는 고백마저 절규로 들릴 때가 있다. 최근에 현대사회를 칭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다. '위험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등. 나는 그 용어들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바로 '처절사회'다. 처절사회의 증상은 절규다. 영화에서건 삶에서건 절규는 우리가 고통스럽고 두려운 상황에 홀로 내던져졌을 때, 그러나 출구는 보이지 않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다. 홀로 내던져짐. 출구 없음.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뭉크가 현대 한국사회를 살았다면 '절규'의 화풍은 더 사실주의적이었을 테고 인물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을 것이다.
심보선 시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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