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가 어둠에 휩싸였다. 한여름이지만 일교차가 커서 밤 공기는 서늘하다. 휙 맨살을 훑고 지나가는 찬 바람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무대 위 시간이 현실처럼 다가온다.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잊어 보려는 주인공들의 연기가 더욱 실감났다.
10일 밤(현지시간) 인구 3만의 프랑스 남부 소도시 오랑주. 1세기 로마시대에 지은 고대극장에서 펼쳐진 야외 오페라 '라 보엠'은 바람과 별과 선율이 어우러진 '한여름밤의 크리스마스'였다. 푸치니의 '라 보엠'은 매년 7월초부터 한 달여 일정으로 오페라 두 편과 독창회, 콘서트 등이 번갈아 공연되는 오랑주 오페라 페스티벌(공식 명칭 코레지 도랑주)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다. 올해는 7, 10일 두 차례 무대에 올랐다. 라보엠은 19세기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을 로돌포(테너)의 '그대의 찬 손'과 미미(소프라노)의 '내 이름은 미미' 등 명 아리아로 엮어낸다. 8,000명 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어 주로 대중적인 오페라를 선보이는 오랑주 오페라 페스티벌에 맞춤인 오페라다.
공연은 이 페스티벌에서 카르멘(2008)과 토스카(2010)를 연출한 적이 있는 나딘 뒤포 연출,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무대에 올랐다. 반원형의 오랑주 극장은 무대 뒷면에 높이 38m의 거대 석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야외 공연장이지만 실내환경 못지않은 뛰어난 음향을 빚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명훈씨도 "평소 야외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곳은 세종문화회관보다 음향이 좋다"고 말했다.
세부 내용보다 최고의 음향을 만끽하라는 뜻인지 공연은 영어나 프랑스어 자막 없이 이탈리아어로만 진행됐다. 무대장치를 간소하게 만든 현대적인 연출이 돋보였다. 너비 70m의 널찍한 공간을 5개로 나누고 130여 명의 합창단을 세워 주인공의 주요 사건 외에 다른 여러 상황이 동시 진행되도록 연출한 2막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최근 주목 받는 이탈리아 테너 비토리오 그리골로와 영화 '제5원소'에 출연했던 소프라노 인바 물라가 각각 로돌포와 미미를 맡았다. 주역들은 감정 연기가 풍부했다. 30대 중반의 그리골로는 '그대의 찬 손' 가사처럼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자"인 혈기 넘치는 시인 로돌포 역을 잘 소화했다.
관객들은 일단 웅장한 규모에 반한 표정이다. 영국에 사는 수잔 싱어(54)씨는 "한 무대에서 동시에 많은 상황이 묘사되는 큰 스케일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현대적인 연출에 대한 호감도 높았다. 파리에서 온 도미니크 라우스트(60)씨는 "'라 보엠'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는 아니지만 오늘 공연은 감각적인 연출 덕분에 음악이 생명력을 얻은 느낌"이라고 평했다.
뒤포는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는 유럽식 야외 오페라"를 표방하며 8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도 이 '라 보엠' 공연을 선보인다. '라 보엠' 한국 공연은 이번 연출을 토대로 무대 폭이 43.5m인 연세대 노천극장 환경에 맞게 변형한다. 이날 연기한 그리골로를 비롯해 세계 정상의 무대인 밀라노 라 스칼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등에서 활동 중인 안젤라 게오르규, 피오렌자 체돌린스(미미), 마르첼로 조르다니(로돌포) 등이 출연하고 정명훈 감독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연주한다. 8월 28일~9월 2일 6일간 4회 공연이 예정돼 있다.
오랑주(프랑스)=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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