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랍의 봄'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5월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민주화 이행을 촉진하는 게 미국의 최우선 가치"라고 밝히면서 이집트, 튀니지 등 민주화를 추진하는 국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독재정권이 무너진 국가에서는 속속 민주 선거가 치러졌고 오바마는 그 때마다 "민주화 이정표를 세운 것을 축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아랍의 민주화를 지켜보는 미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뉴욕타임스(NYT)는 9일 미국이 아랍 민주화 이후 외교정책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에 대한 오랜 전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아랍의 봄 성과로 치러진 선거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은 대거 약진했다.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 소속 무함마드 무르시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튀니지에서도 이슬람주의를 내세운 정당이 다수당을 차지했으며 지난주 리비아 선거에서도 무슬림형제단의 선전이 예상된다.
과거 이들 이슬람주의 세력은 미국의 친구가 아니었다. 2005년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한 콘돌리사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은 "미국은 무슬림형제단과 관계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2001년 9ㆍ11 테러가 발생한 후 테러에 대한 위협이라는 렌즈를 통해 아랍을 평가했고 이슬람주의자들을 위험 세력으로 간주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아랍정책 우선 순위는 안정적 석유 확보와 이스라엘 보호였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가치는 뒷전이었다. 미국이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등 독재세력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배경이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 이슬람주의자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자 미국은 이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를 지지했지만 막상 그 결과에는 당황하는 모습이다. 아크바 아흐메드 아메리칸대 이슬람연구소 소장은 "지금 미국은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중동을 바라보고 있다"며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고 NYT에 말했다.
미국이 직면한 변화와 혼란의 단면은 지난달 테러단체와 연관된 이집트 의원이 입국한 일에서도 드러난다. 하니 누르 엘딘 의원은 1997년 미국이 테러 조직으로 지정한 가마 알이슬라미야 소속이었지만 비자를 발급받고 국무부 관리들과 회담까지 했다. 무르시 대통령이 테러 모의 혐의로 미국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오마르 압둘 라흐만의 석방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도 미국에게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아랍권 국가와의 관계에서 길고 논쟁적인 조정과정을 시작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슬람주의의 부상이 미국에게 테러보다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미셸 던 연구원은 "이집트에서 테러리스트들은 무바라크에 저항하면서 성장했다"며 "이슬람 세력이 중앙 정치에 뛰어들면 테러 위협이 감소할 것"이라고 NYT에 말했다. 그는 "무슬림형제단 등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면 비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