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감기 들어 독한 약 먹고 나왔어요. (목소리가)나올란지 못 나올란지 한번 해봅시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송순섭(73)씨가 뽑아 올린 '단가'는 이내 그의 몸과 하나가 됐다. "인생 백년이 어찌 이리 허망하랴…."이어 무대에 오른 성창순(78)씨는 '백발가'를 들고 나왔다. "백발이 섧고 섧다"까지 하던 성씨는 "가사를 잊어먹었다"며 고수와 몇 마디 재담을 주고 받다 다시 가락을 이어간다.
9일 서울 필동 한국의집 봉래실. 백전노장 판소리 명창들과 최고의 재비들이 펼쳐 보인 맛보기 공연은 일고수 이명창이란 국악 관용어를 실감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16일부터 닷새 동안 삼성동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득음지설(得音知設)-김홍신 교수의 판소리 감상설명서'란 제하로 펼쳐질 무대의, 이를 테면 프레스리허설 자리였다.
이번 공연은 직계제자에다 인기 작가까지 가세하는 독특한 무대여서 오욕칠정을 모두 삭힌 듯한 득음의 고수들도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박송희(85)씨는 "옛날 같으면 여자들은 토막소리나 눈대목(하이라이트)만 했는데 이런 자리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송씨는 "내가 판소리 인간문화재 중 가장 어리다"며 "세계에 내놔도 손색없는 문화재가 되기 위해 게을리 않겠다"는 다짐을 들려줬다.
우리 소리로 차려내는 잔치상의 주재자는 소설가 김홍신(65)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좌교수. 서재처럼 꾸민 무대에 명창과 고수들이 차례로 나와 눈대목을 하나씩 뽑아 올리고, 김 교수가 그 소리에 대한 감상과 해설을 덧붙인다. 득음의 경지를 언어로 설명하는, 작가와 명창의 조합이라는 전에 없던 무대다.
전체 공연이 스승ㆍ제자의 합동 무대여서 두 세대 판소리를 한자리에서 만끽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이채롭다. 16일은 남해성ㆍ왕기석의 '수궁가' 중 상좌다툼(고수 조용수), 17일은 박송희ㆍ서진경의 '흥보가 중 박 타는 대목(고수 김청만), 18일은 성창순ㆍ박인혜의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고수 송원조), 19일은 성우향ㆍ김수미의 '춘향가' 중 사랑가(고수 송원조), 20일 송순섭ㆍ이정원의 '적벽가' 중 적벽대전(고수 박근영) 등이다.
김홍신씨는 이날 "(나는)서양 가면 '변방에서 온 작가'로 소개돼 온 관행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 왔다"며 "이번 무대는 한민족의 DNA를 되살려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라고 말했다. 김씨는 "전 바탕을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는데 (공부해 나가면서)우리 문화의 존엄함을 더욱 깨닫게 될 것"이라며 "한류ㆍK팝 세대나 가수ㆍ제작자들이 전통 공연을 보고 자신들의 근원에 대해 배우고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류관현 문화예술실장은 "본격 판소리 무대를 앞둔 '판소리 사용 설명서'격의 자리"라며 "사설의 깊은 느낌이 배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연장인 '풍류'는 무대와 객석이 지근거리다. 옛 사랑방 풍류의 정취를 고스란히 되살리는 데 제격이다. 공연은 모두 오후 8시(02)3011-2178~9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