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벗들과의 술자리였다.
영남 출신 친구가 "이번 대선은 PK(부산ㆍ경남) 민심이 결정하는 것 아닌가"라고 화두를 던지자 옆 자리 녀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무슨 소리. 노무현 선거 기억 안나? 영ㆍ호남 싸움에서는 충청권이 캐스팅보트를 쥐잖아."호남 친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래도 야권 주자는 통상 호남이 결정해왔지"라고 말했다. 그리곤 이들은 답을 구하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셋의 견해가 각각 타당성이 있고 나름 근거도 있어서 모두 옳은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특히 야권이 그런 논리에 취해 있는 것 같다며 한마디 덧붙였다.
야권에서는 현재 안철수 문재인 김두관 등 PK 출신 대선 주자가 득세를 하고 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해서 PK에 충청을 합하는 지역 연합으로 대선 승리를 일궈낸다는 전략이다.
대선에서 중요하지 않은 지역이나 유권자가 있을리 없지만 이들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간과한 것 같다. 세상이 바뀌듯 선거 문화도 바뀌고 표심도 바뀐다. 선거 운동이나 전략이 트렌드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 후보자의 당선은 기약하기 힘들다.
손자병법에는 전쟁에서 같은 방법으론 두 번 이길 수 없다는 뜻의 '전승불복(戰勝不復) '이란 말이 있다. 영남 출신 야권 후보 필승론은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가 사용한 카드다. 호남ㆍ충청권의 지역 연대도 1997년 DJP가 연합해 이미 재미를 본 바 있다. 과연 두 번의 대선에서 야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이 방식이 이번에도 통용될지 한번 따져보자.
야권은 4ㆍ11 총선에서 PK지역의 40%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적인 일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대선에서도 이 정도 득표를 하고 충청권에서 선전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총선은 각 지역마다 다른 후보자가 나선다. 지역구마다 후보자들과 직간접적인 연(緣)을 맺고 있는 유권자들이 넘쳐난다. 이들이 총선 때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 해서 대선 때도 모두 같은 번호에 기표할 것으로 본다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이번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유력시 되는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경우 PKㆍ충청 지역 표의 견고성이 이전 대선 후보들과는 다르다. 영남 출신인 데다 충청 지역엔 외가(外家)가 있어 나름대로 연고가 작용한다. PK와 충청이 대선에서 중요한 것은 틀림없으나 결정적으로 승부를 돌릴 만한 요소가 되긴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역시 관건은 중도 성향에 지역 연고성이 작은데다 막판까지 후보를 저울질하다 마음을 정하는 수도권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봐야 한다. 실제 투표자 수만으로도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1,200만여 표가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5~6%포인트만 앞설 경우 그것이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
손학규 민주당 고문은 최근 '영남후보 한계론'을 주장하며 수도권 공략이 유일한 '블루 오션' 전략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일견 타당성이 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수도권 표심의 특징은 특정 후보나 정당에 계속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네거티브 공세에 잘 현혹되지 않을 정도로 정치적 성숙도도 높다. 불과 몇 곳을 제외하곤 수도권의 그 많은 지역구에서 총선 때마다 승패가 엇갈리는 결과가 나오는 점만 봐도 이 같은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저변을 흐르는 커다란 표심의 방향성은 분명 있다.
그간 대선에서 수도권 성적은 전체 승부와 일치했다. 15대 대선 이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후보는 각각 상대 후보에게 서울 인천 경기 3곳에서 모두 적잖은 표차로 이겼다. 누가 미래지향적 비전을 제시하느냐, 누가 시대 정신에 부합하느냐를 수도권 유권자들은 꼼꼼하게 따져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 아칸소주 주지사 출신 빌 클린턴이 대선에 처음 출마했을 때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란 구호를 앞세워 당시 대통령인 조지 부시 후보를 눌렀던 사실을 떠올리며 친구들에게 결론을 말했다. "문제는 수도권이야. 바보야!"
염영남 정치부 차장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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