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의 안쪽으로 들어가니 상등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 보고 우리는 병사들에게 그것을 알아서 나누어가도록 했소. 이때에 급보가 갔던지 포도청 아이들이 창칼에 총포를 겨누고 선혜청 도봉소를 포위합디다. 우리는 번이 끝나 퇴청한 처지라 무기는커녕 군복조차 벗어버린 이가 태반이라 무력하게 보고만 있는데, 포도종사관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군중 속으로 들어와서는 주동자가 누구냐고 외치니 피투성이의 민 씨네 청지기와 하인들이 별장이며 포수 몇몇을 지목했지. 종사관이 모두들 흩어지지 않으면 모조리 포박하겠다고 을러대어서 비칠거리며 물러날밖에. 더구나 저녁이 되자 우리의 지휘관인 김춘영(金春永) 영장(營將)을 체포해갔다는 소식이 나돌았지요. 나도 지목을 받지는 않았지만 잡혀간 동무들과 똑같은 처지요 입장이고 보니, 그들이 오라에 묶여 잡혀가는 꼴을 지켜보고 나서 어찌나 창피하고 분했던지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만 폭음을 하고 말았소이다.
서일수가 침통하게 만복의 이야기를 듣고 앉았다가 말을 꺼냈다.
나도 한양에 와서 들은 얘기가 많았고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구먼. 이미 수년 전에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게 부산 원산 인천의 항구를 열어주고, 그들 돈을 마음대로 통용시켜주고, 배와 화물의 관세를 면제해주기로 하였다더군.
지금 임금 십삼 년이었으니 이미 육 년 전 얘기올시다. 대원의 대감이 물러나고 민씨 집안의 외척 세도 정치가 시작된 뒤부터였지요.
그러니 바깥 사정을 보아가며 대문도 열어놓아야 할 텐데 집 안은 개판 쳐놓은 채로 열어놓았으니 온갖 깍쟁이 무뢰배가 기웃거릴 것은 당연한 노릇이지.
그게 모두 일본이 서양 것들에게 당했던 그대로를 우리에게 덤터기 씌운 게랍니다. 다섯 영을 부활시키고 별기군을 폐지할 것과 왜적은 물론 서양 제국과의 수호조약을 폐기할 것을 좌의정 등이 상소를 올렸지만, 척사척왜(斥邪斥倭)를 주장하던 선비들까지 하옥시켰지요. 지난봄부터 석 달 동안에 조정은 미국, 영국, 독일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답니다.
그래, 이제부터 어쩔 작정인가?
서일수가 물으니 김만복이 저고리 위에 군복 더그레를 걸치고 전립을 쓰면서 대답했다.
시정에 나아가 새로운 소식을 들어보고 영의 군교들과도 의논할 작정이우.
같이 나가세. 요기라도 해야지.
세 사람은 집을 나와 밥 대어 먹던 내외주점으로 가지 않고 청계천을 건너 종루 쪽으로 올라갔다. 배오개 뒤편 피맛골에 들어서니 언뜻 보기에도 대번에 알아볼 정도로 군복 무릎치기 상의나 흑립 쓰고 덧저고리 걸친 가뿐한 차림의 상민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개가 군인들로 보였다. 그들이 국밥집으로 들어가 앉으려는데 저쪽에서 장정 두엇이 만복을 알아보고 얼른 상머리로 다가왔다. 그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일수와 이신통을 훑어보았고 김만복이 먼저 한마디 던졌다.
염려 놓게, 내 동무들이니……
하나는 만복이처럼 군복 차림이고 다른 하나는 덧저고리에 패랭이 쓴 장사치 복색이었다. 그들은 상머리에 둘러앉더니 차례로 말했다.
좌포청이 지척이라 포교 아이들에게 알아보았더니 이제 국문이 시작되는 모양일세.
영장 어른이 체포되었다면서?
만복의 물음에 패랭이가 말했다.
병판 대감이 직접 영을 내렸다네. 군문에 작변한 자는 역적이니 모두 잡아 본보기로 사형시키라고 했다네. 영장 어른 말고도 우리 군영의 별장 포수가 셋에다 병졸이 둘일세. 병졸은 이미 초죽음이 되었다는데……
배오개 피맛골에서 좌포청까지는 가운데 동별영을 끼고 그야말로 한 골목 사이라, 군교들이 각자의 안면을 통하여 포도청 군교들에게서 국문의 진행 과정을 옆에서 듣는 것처럼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주 높은 사람을 빼고 일반 군교들은 어제 선혜청의 소란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어서 누가 나쁜 놈들인지 판단을 내린 뒤였다. 그래서 포도청 형리들도 태형의 영이 떨어지면 알아서 슬슬 때리고 급소를 피해준다는 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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