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전문 배우라고 불릴 만큼 미간의 주름만으로도 섬뜩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 윤제문(42)이 공무원으로 옷을 갈아입고 악기를 들었다. 12일 개봉하는 '나는 공무원이다'에서 윤제문은 마포구청 환경과에 근무하는 7급 공무원 한대희로 출연한다. 정시 퇴근과 자유로운 여가활동이 보장되는 삶에 억대 연봉도 부럽지 않다고 자족하는 인물이다. 우연히 무명 밴드와 엮이게 된 대희는 지하실을 연습실로 내주는 것도 모자라 베이스 연주자로 밴드에 합류하게 된다.
'나는 공무원이다'는 윤제문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영화다. 대희는 탐욕스런 재벌 2세(드라마 '마이더스'), 왕위 찬탈을 꾀하는 비밀조직의 수장(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왕실과 대립하는 거물급 무기상(드라마 '더킹투하츠')과 전혀 다른 인물이다. 무심한 듯 능청스럽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하다. "작년 초니까 아마 '마이더스' 촬영할 때였을 겁니다. 연극 '아트'에도 출연할 때였죠. 제겐 처음이라고도 볼 수 있는 캐릭터였고 시나리오도 재미있어서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마와 연극 출연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지만 그는 신나게 촬영했다고 했다. 30년 넘게 살았던 마포구가 극중 배경인 것도 그의 마음을 끌었다. 록 음악을 좋아한 적은 없지만 고교시절 클래식 기타를 쳤던 게 이번 영화 출연에 적잖은 도움을 줬다. "몸은 힘들었지만 신나게 촬영했어요. 조연으로 출연할 때와 달리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펼치기도 했죠. 밴드 멤버로 나오는 친구들도 모두 순수하고 건강해서 즐겁게 찍을 수 있었어요."
충무로의 주연급 배우로 올라서기까지 그에게도 배고픈 연극배우 시절이 있었다. 한때는 음반과 아동복도 팔고 공공근로도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난 뒤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욱하는 마음에 잠시 연기를 그만두기도 했다. 대학로로 돌아간 그의 재능을 충무로까지 알린 건 연극 '청춘예찬'이었다.
"박근형 연출가는 제 인생의 은인 중 한 분입니다. '청춘예찬' 덕에 봉준호 감독과 임필성 감독을 만나게 됐죠. 봉 감독이 '살인의 추억'에 저를 캐스팅하려 했는데 마땅한 배역이 없어 못했다더군요. 그 후 봉 감독이 임필성 감독에게 저를 소개시켜줘 '남극일기'(2005)에 출연하게 됐죠."
'남극일기'에서 보여준 윤제문의 인상 깊은 연기는 '열혈남아'(2006) '비열한 거리'(2006) '우아한 세계'(2007)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로 이어졌다. "의도치 않게 세 영화 연속 조폭으로 출연하게 됐죠. 그때 인상이 강했는지 어떤 영화 현장에서 누군가 저를 '조폭 전문배우'라고 부르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잠시 의도적으로 악역, 조폭 캐릭터를 피하기도 했습니다."
윤제문은 "이젠 악역이건 조폭 연기건 상관 없다고 본다"고 했다. 차기작은 두 편의 영화 '동창생'과 '전설의 주먹'이다. '동창생'에선 국정원 요원으로, '전설의 주먹'에선 한 물 간 건달로 출연한다. 연말엔 극단 골목길의 10주년 공연도 예정돼 있다.
"17년간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정신 없이 달려왔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읽으며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야 맛을 좀 느낄 것 같다고 말이죠. 괜히 신이 나고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부터가 출발이고 시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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